[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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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9) 나의 부모님

나는 1922년5월30일 (양력) 평안북도 昌城郡 靑山面 靑龍洞 34번지에서 태어났다.

창성군은 압록강을 낀 중국과의 국경지대로 남북 양끝이 2백리 가량되는 길쭉한 지형을 지녔다.

창성군 한 복판에는 강남산맥 줄기가 동서로 길게 형성돼 있는데 그곳에서는 산맥 안쪽을 '영내' (嶺內) , 바깥 쪽을 '영외' (嶺外) 라고 구별해서 불렀다.

청룡마을은 그 중에서도 맨 끝 자락 영외로 대표적인 금광지역인 운산 (雲山) 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평안도에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초기라고 들었다.

나의 15대조 할아버지 (姜自盛) 는 조선시대 초기 변경수비대장을 지내신 분인데 이때부터 우리 진주 강씨 집안이 이곳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그분의 할아버지는 당시 영의정을 지낸 후 '문경공' (文景公) 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청룡동은 50가구 정도가 농사로 근근히 끼니를 이어 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전기, 전화, 라디오는 물론이고 바깥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정보.통신 시설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방 안에는 호롱불이 고작이었다.

어쩌다 우편 배달부나 산림 감시원이 찾아오면 어머니께서는 마치 칙사대접하듯 밥상을 크게 차려 대접하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제사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닭을 잡고 술을 빚어 마시는 등 마을의 큰 행사가 되곤 했다.

내 조부께선 오직 농사밖에 모르는 분이셨지만 아버지 (姜炳憲) 는 일찍이 한학을 배운 탓에 서당 (書堂)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토지 측량기술을 배우셨는데 그게 당시로서는 대단한 기술이었다.

1910년대 무렵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농민들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아마 이것을 계기로 측량기술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우리집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몇뙈기의 논밭 농사에다 양잠까지 했던 것으로 보아 소지주 정도는 됐었던 것 같다.

또 문맹률이 높았던 그당시 우리집에서는 항상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어느 집이건 편지가 오면 으레 우리집에 와서 읽어 달라고 했고 아버지가 편지를 대신 써 주기도 했다.

나는 4남2녀 가운데 장남이고 지난번 평양에서 만났다는 영숙이가 바로 두 살 아래 여동생으로 딸 형제중 맏이다.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유달리 자애로운 성품을 지니셨던 어머니 (李炳姬) 는 장남인 나를 가장 총애하셨다.

그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정신적 부담 같을 걸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게 사실이고 그로인해 나머지 동생들은 상대적인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서당을 다니다가 보통학교 (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한 후 열 다섯살 되던 해에는 영변 (寧邊) 농업학교 (5년제)에 들어갔다.

같은해 나는 평양사범학교에도 응시하려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하숙집 주인이 나를 보고 "사범학교 보다는 평양중학이 좋겠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의논을 드렸더니 "중학교에 가면 대학을 가야 하는데 언감생심 꿈도 못 꿀 형편 아니냐" 며 은근히 반대하셨다.

그해 사범학교 입시에서는 낙방이 됐다.

영변 농업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민족문제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내가 '민족' 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뭐니뭐니 해도 우리 조선 사람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목격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어린 내 눈에도 조선 사람들은 콩알 하나만 생겨도 나눠먹고, 어떻게 해서든 남을 도우려는 착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나도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지금의 북한도 그렇지만 당시 3, 4월 춘궁기가 되면 그야말로 초근목피 (草根木皮) 로 연명하는 것이 예사였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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