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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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9장 갯벌

시름을 겪다가 제풀에 겨워 곯아떨어졌던 봉환을 흔들어 깨운 사람은 태호였다. 날은 어느새 밝아 있었고, 여객선은 벌써 웨이하이 (威海) 국제선 터미널에 입항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손등으로 눈곱을 떼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손씨는 역시 보이지 않았다. 태호가 알아채고 손씨가 한 시간 전에 한 번 다녀갔다는 얘기만 들려주었다. 입항을 기다리는 선실 안은 파장 무렵의 장바닥처럼 어수선하게 북적거렸다.

선실 안은 터져나오는 기침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피어오른 먼지와 냄새로 가득했다. 통관 절차는 꽤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부두 저편에는 여객선에 승선한 보따리들을 기다리는 현지 상인들로 붐비고 있었고, 연두색 군복 차림의 중국측 세관원들은 시종 무표정한 얼굴로 트랩을 내려가는 승객들을 가파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손씨를 발견한 것은 태호와 같이 트랩을 내려오던 도중이었다. 그 순간, 봉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손씨의 공손한 곁부축을 받으며 트랩을 내려오고 있는 사람은 봉환이가 상상했던 바로 조여사였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그가 문을 두드렸던 그 선실은 바로 조여사의 방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통관이 끝나고 출국장 밖으로 나선 것은 오전 10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보이는 사람이나 들리는 소리는 태반이 한국말이었다.

난생 처음 타국땅에 떨어졌다는 긴장감이나 신선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출국장을 벗어나서부터 보따리 상들이 가져온 상품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지 중개상이나 도매상들에게 선을 보인 보따리들의 상품은 거개가 한국시장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잡화였다. 청바지. 핸드백. 화장품. 스타킹. 란제리 같은 장신구와 의류를 비롯해서 술과 식품. 전기면도기. 가위. 단추. 전자제품까지 다양했다. 그토록 종류는 다양했지만, 통관 절차 때문에 수량은 적었다.

중국 현지의 중개인들이 첫 거래에 엄청난 주문을 해준 것에만 흥분돼 상품을 가지고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한 보따리들도 여럿이었다.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거나, 약속과는 달리 가격을 엄청나게 후려칠 수도 있었고, 단속망을 피해 주겠다며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엄청난 바가지를 씌우는 사례가 공공연하게 있어 왔기 때문이었다.

부대끼고 시달림을 받다 못한 보따리상들은 그래서 베트남이나 몽골의 거래처를 트기 위해 뛰고 있기도 한다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었다.

조여사와 거래하는 중개인은 출국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여사가 가지고 간 상품은 수십 종을 헤아리는 단추였다. 부피도 크지 않고 무게도 없었다. 웨이하이에 있는 의류 생산공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도매상이 조여사에게 주문한 품목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짐꾼 역할은 벌써 부두의 출국장 밖에서 끝나 버렸다. 일행은 북새통이 벌어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까스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인천으로 회항할 여객선에 실려갈 중국 상품들과 보따리들이 입국하는 보따리들과 서로 뒤엉켜 말 그대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으로 실려가는 상품은 거의가 농산품들이어서 들어오는 상품들보다 부피가 컸다. 가까스로 북새통 속을 벗어나 담배 한 대를 달아 물었을 때 전신은 땀투성이였다. 한시름 놓게 된 두 사람은 출국장 부근의 북새통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한 사내가 다가오며 중국말로 은근하게 몇 마디 걸어 왔으나 대꾸를 못하고 주저하고 있으려니 곧장 비켜가 버리고 말았다. 사내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봉환이가 물었다.

"저느마 시방 우리한테 뭐라고 씨부리고 내빼부드노?" "그 자식이 뭐라 했는지 난들 어떻게 알겠어. 마약 팔 게 있는지 물어 봤을지도 모르지. " "니 시방 뭐라캤노? 그런 엄청난 소리 함부로 해도 되나?" "난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형이 중간 운반책쯤으로 보였던 모양이지?" "그런 농담 치우고 손씨나 찾아 봐라. 이 사람 어디로 내빼뿌고 콧디도 안 보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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