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 지원 헛돈다 上] 이렇게 돈이 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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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이들을 통한 올 1분기 수출액을 전년보다 5.7% 늘리는 효과를 거뒀다.

국내기업 전체 수출액이 5.9% 줄어든 데 비하면 괜찮은 성과다.

자금만 따져도 올해 중소.벤처기업 지원비로 책정된 예산은 4조원에 가깝다.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을 통한 정보통신부의 1조3백50억원, 중소기업진흥공단을 통한 중소기업청의 8천1백14억원, 산업자원부 6천2백억원, 과학기술부 1천5백45억원에다 자치단체마다 상당액이 별도 책정돼 있다.

그러나 이 중엔 새나가는 액수가 적지 않다.

무자격 업체가 서류변조로 돈을 빼가는가 하면, 같은 사업내용을 가지고 이름만 바꿔 이곳저곳에서 중복해 타낸다.

창업이나 신기술 개발.새 설비 등 명목으로 지원받아 회사 운영비로 쓰는 것 역시 흔한 수법. 지원창구가 다원화돼 있다 보니 누수액은 정확한 집계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지원과 관련한 로비.외압도 빠질 리 없다.

◇ 조작하고 유용하고 = 중소.벤처기업 지원자금이 새는 가장 일반적인 유형. 경기도내 PVC파이프 제조업체 H산업은 지난해 중소기업진흥공단을 속여 설비자금 4억3천만원을 타내 회사운영비로 쓰다가 지난 3월 공단에 발각됐다.

원료공급원인 대기업 L사로부터 원료가공 설비를 지원받기로 계약해놓고도 자체구입하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한 것. "경영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고 회사측은 실토했다.

정보화촉진기금 3억원을 받았던 프린터 및 스캐너 제조업체 T물산도 지난해 5월 사업완료보고서를 제출하면서 가짜 거래내역서와 영수증으로 컴퓨터 등 전산장비를 구입한 것처럼 속였음이 정통부 실사 결과 확인됐다.

지난해 시설거래서를 조작해 정보화촉진기금을 타냈던 K정보통신 사건의 담당검사는 "수사중 정치권 인사들과 검찰 상층부가 '잘 봐주라' 는 압력성 청탁을 해왔다" 고 술회했다.

'모처럼의 벤처 창업 붐이 기가 꺾여서야 되겠는가' '그간의 경력.공로를 감안해 기회를 주는 게 현명할 것 같다' 등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서류조작은 걸리지 않는 것이 많다.

가장 큰 액수의 자금을 집행하는 정보통신연구진흥원 관계자는 "대상기업들에 대한 개별적 현장실사가 인력 여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고서에 이상한 낌새가 보일 때만 실사를 나가는 실정" 이라고 말한다.

진흥원은 지난해 7월 부품제조업체인 J사에 7천8백만원을 날렸다.

'3$ 칩 트리머 커패시터 신규모델 개발' 을 위한 연구지원금이었다.

이 회사 역시 돈을 인건비와 부도를 막는 데 쏟아붓다 석달만에 부도로 쓰러졌다.

망하는 회사에 예산을 낭비한 셈이다.

관계간부는 "공장이 잘 돌아가는 것으로 판단했다" 며 역시 인력부족을 탓했다.

◇ 중복지원 알 수 없다 = 부산의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H시스템은 지난 2년 동안 법인명을 네차례나 바꿨다.

96년 정통부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관련 과제 2건에 4억원을 지원받았으나 1년뒤 제출한 연구완료보고서가 '불량 불성실' 판정을 받아 최고대출금리로 자금을 회수당할 위기에 몰렸다.

이 정보를 입수한 대표 P씨는 당초 금리로 돈을 미리 갚아버리고는 B사로 법인명을 변경했다.

그리고 얼마뒤 자신의 부인을 사장으로 내세워 S사로 고쳤다가 다시 얼굴사장을 내세워 C사로, 최근엔 아버지 명의의 H시스템으로 개명했다.

정통부 관계자는 "여러 부처에서 잇따라 지원금을 타내기 위한 이름 바꾸기였던 것 같지만 부처간 조회.확인은 불가능하다" 고 말했다.

지원을 받으려고 턱없이 높은 수준의 연구개발 목표를 제시했다가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컴퓨터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M텔레콤은 지난해 2월 '가상현실 네트워크 게임 타당성 연구' 란 과제로 정부출연금 2천만원을 받았으나 두달뒤 예정된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아 출연금 환수 등의 제재를 받았다.

J사장은 "유망 중소기업인의 일원으로 대통령 해외순방을 수행하는 바람에…" 라고 변명했지만 자금을 내줬던 정보통신연구진흥원에선 "애초 역부족이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 김석현.신동재.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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