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68> 일상 속의 장좌불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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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수행’이라고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세요? 깊은 산중에서 가부좌를 틀고 면벽수도(面壁修道)하는 수행자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1주일씩, 혹은 열흘씩 한숨도 자지 않고 버티는 ‘용맹정진’인가요? 그도 아니면 10년이고, 20년이고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인가요?

그럼 ‘삼매(三昧)’하면 어떤 상태가 떠오르세요? 정신을 집중하고, 집중하고, 또 집중해서 ‘고~옹!’한 상태를 만나는 건가요? 아니면 나도 잊고, 너도 잊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경지를 체험하는 걸까요?

‘깨달음’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번쩍!’하는 순간, 중생이던 내가 부처로 탈바꿈하는 걸까요? 지지고 볶던 사바세계에서 ‘휘~리~릭!’ 하고 꿈결 같은 서방정토로 이사 가는 걸까요? 그래서 한 순간에 도인의 경지에 오르는 ‘수행의 로또’ 같은 걸까요?

10년씩, 20년씩 바닥에 눕지 않는 장좌불와, 깨닫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결코 일어서지 않겠다는 불퇴전(不退轉)의 결심 등. 듣기만 해도 근사하죠. ‘이런 게 진짜 수행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부작용도 큽니다. 왜냐고요? 그걸 상식처럼 여기는 이들에게 수행은 결국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마니까요. 재가자는 말하죠. “우리는 못해. 그건 출가한 스님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출가한 스님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못해. 그건 선방의 수좌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선방의 수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못해. 그건 정말 목숨을 내놓고 수행하는 일부 스님들이나 가능하지.”

그래서 수행은 ‘나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 되고 맙니다. 왜냐고요? 수행과 깨달음을 너무 ‘신화화(神話化)’했기 때문이죠. 수행담이 ‘땅 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 너머의 이야기’가 돼버린 거죠. 수행을 위해 손가락을 태우고, 토굴에 들어가 하루 한 끼만 먹고, 수십 년간 자리에 눕지 않고, 죽을 때도 앉은 채로 입적하는 것을 마치 ‘깨달음의 필수 조건’ 혹은 ‘깨달음의 징표’처럼 여기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누워서 돌아가신 스승을 일으켜 앉혀서 사진을 찍고, ‘ㄴ’자로 관(棺)을 짤 정도가 돼버린 겁니다. ‘좌탈입망(座脫立亡)’이란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죠.

그런 ‘신화 만들기’는 생활과 수행을 서로 멀찌감치 떼어놓습니다. 결국 ‘생활 따로, 수행 따로’가 되고 말죠. 그런데 붓다는 달리 말했습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했거든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얘기죠.

가령 금고문을 열 때는 어떻게 하나요? 무턱대고 도끼나 망치로 “쾅쾅” 부수나요? 그렇지 않죠. 금고의 다이얼을 왼쪽으로 “딸깍 딸깍”, 오른쪽으로 “딸깍 딸깍” 하면서 번호를 맞추죠. 그렇게 다이얼을 맞추어 나갈 때 두꺼운 철문도 “덜커덩!”하고 열리는 겁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죠. ‘나의 마음’을 ‘우주의 마음’에 하나씩, 둘씩 맞추어가는 겁니다. “둘로 보지 마라”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라” 등등. 경전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며 우측으로 “딸깍 딸깍”, 좌측으로 “딸깍 딸깍” 다이얼을 맞추어가는 거죠. 그걸 통해 ‘나에 대한 오해’를 ‘나에 대한 이해’로, ‘우주에 대한 오해’를 ‘우주에 대한 이해’로 돌리는 겁니다. 그럴 때 우주와 내가 함께 숨을 쉬죠. 법의 등불이 “깜박깜박”할 때 내 마음의 등불도 “깜박깜박” 하는 거죠. 그게 바로 수행이죠. 법의 등불과 나의 등불이 함께 깜빡이는 순간이 바로 삼매죠.

그러니 가장 치열한 수행의 장이 어디일까요? 그렇습니다.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나와 우주에 대한 오해’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죠. 거창한 얘기가 아닙니다. 집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하나씩 대입하며 살펴보세요. 내 욕심을 태우는 게 소신공양이고, 쉼 없이 나의 오해를 깨닫는 게 장좌불와이고, 금고(마음)의 문을 다 열어 젖히는 게 좌탈입망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죠.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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