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유대인의 정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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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런던대 오리엔트 - 아프리카학 대학 (SOAS) 의 유대학자 튜더 파피트 교수는 몇해 전 남아프리카에 강연하러 갔다 뜻밖의 일을 겪었다.

그곳 토착민인 반투인 청중 몇사람이 자기네도 유대인이라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자기 부족이 옛날 '부바' 라는 지도자를 따라 '센나' 라는 곳에서 옮겨왔으며, 할례와 안식일 등 유대의 율법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고 했다.

2년 전 파피트는 아라비아반도 끝의 예멘을 여행하다 우연히 '센나' 를 찾았다.

그곳에는 옛날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1천년쯤 전에 저수지가 파괴되고 주민들은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전설이 있었다.

깜짝 놀란 파피트는 주변 상황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예멘에서 남아프리카로의 유대인 이주에 깊은 심증을 가지게 됐다.

바람이 맞을 때면 남아프리카는 예멘에서 돛배로 열흘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최근 파피트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뜻밖의 방향에서 나왔다.

부바의 후예를 자처하는 레반족의 염색체에서 유대인의 고유한 특징이 유전학자들의 손으로 확인된 것이다.

남자만 갖는 Y염색체는 부계 (父系) 를 통해 전해지는 염색체다.

이 염색체는 오랫동안 형질이 잘 보존되는 특징을 가졌다.

2백년 전 토머스 제퍼슨이 흑인 사생아를 남겼느냐 어쨌느냐 하는 얼마 전의 이색적 스캔들도 Y염색체 조사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구약에 따르면 모세의 형인 아론의 자손들이 대대로 사제가 됐다고 한다.

유전학자 마이클 해머 교수는 Y염색체 조사를 통해 이 기록의 사실 여부 확인을 시도해 긍정적인 결론을 얻었다.

사제계급 (성직자 '랍비' 와 다른 세습적 신분) Y염색체의 특징적 패턴을 설정하고 여러 인구집단에서 확인해 보니 사제계급은 절반 정도, 일반 유대인은 3~5%가 이 패턴을 보인 반면 비유대인에게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인구 5만명의 레반족도 이 패턴을 다른 유대인사회와 비슷한 분포로 보인 것이다.

레반족 전체는 10% 정도, 그 가운데 귀족으로 통하는 부바 부족은 53%가 이 패턴을 보였다.

1천년 전 남아프리카로의 이주를 이끈 부바와 그의 부족은 바로 아론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세운 것은 유럽에서 온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건국 후에는 아랍권을 비롯, 세계 각지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 온 유대인들이 모여들어 이스라엘을 '문화의 용광로' 로 만들었다.

80년대에는 내전에 빠진 에티오피아 남부의 대규모 유대인 집단을 이주시켜 세계의 눈길을 끈 일도 있다.

이제 남아프리카에서까지 집단이주가 있을지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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