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3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39) 내영화 동반자들

나의 영화인생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 그들의 조언과 충고를 피와 살로 삼아 비로소 나는 영화속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었다.

앞에서 몇차례 언급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과 정일성 촬영감독, 송길한 작가 등등 내 영화 작업에 적잖은 도움을 준 사람들은 이들 말고도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80년대의 영화인생을 정리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분이 화천공사의 박종찬 사장이다.

내 영화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80년대의 대부분을 나는 화천공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박 사장과의 만남은 '상록수' 시절로 올라간다.

78년에 개봉됐으니 우리의 만남은 그보다 1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사장은 선대부터 개성상인의 성실성으로 무장된 사업가였다.

지금은 활동이 뜸하긴 하지만 당시만해도 화천공사는 하길종 감독을 비롯, 배창호.이장호 감독 등을 키워낸 명문 제작사였다.

그로부터 나는 내 영화사에 굉장히 중요한 작품들로 기록될 영화들을 줄줄이 냈다.

'족보' 를 비롯, '깃발없는 기수' '만다라' '오염된 자식들' '길소뜸' '아다다' 등등. 이런 작품들을 내면서 10여년 동안을 박사장과 일한 셈이다.

제작자로서 박사장의 가장 큰 장점은 '무간섭주의' 였다.

일단 감독한테 작품을 의뢰했으면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또한 박사장은 작품을 고르는 안목도 뛰어났다.

앞에서 말한 화천공사의 작품들은 웬만한 제작자가 아니면 손을 댈 수 없는 소재들이었다.

흥행성보다는 예술성을 지향할 수 밖에 없는 문예물이었다.

그런데도 박사장은 좋은 글을 읽다가 영화로 만들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나에게 영화화를 권했다.

아주 작은 소품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염된 자식들' 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 작품은 유익서 원작의 소품, 즉 장편 (掌篇) 소설이 모티브가 됐다.

아무튼 화천공사와 박사장은 내가 이전까지의 '저급한' 감독에서 패턴을 완전히 바꿀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뿐더러 정상궤도에서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도록 텃밭이 돼 준 곳이었다.

철학자이자 한의학자인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도 내 영화인생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다.

김교수와는 '씨받이' 때 처음 만났는데, 나름대로 '씨받이' 을 평하는 게 무척 신선했다.

그로부터 친분을 쌓은 나는 김교수로부터 '우리가 산다는 것' '세상사의 이치와 흐름' 등을 배울 수가 있었다.

제도권 교육이 일천한 내가 내 나름대로의 철학적 체계를 구축하는데에는 김교수의 도움이 컸다.

정말 긴 시간을 두고 서로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 보아야 하는 지를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동학의 인내천 (人乃天) 사상에도 눈을 떴고, 이게 계기가 돼 우리는 '개벽' (91년) 이란 작품을 함께 만들 수 있었다.

소설가 이청준씨도 나에겐 오랜 동반자다.

'서편제' 시절부터 만났는 데, 같은 남도의 정서 때문인지 쉽게 친해졌다.

그런 이심전심의 우정이 활짝 피어난 작품이 바로 '축제' (96년) 다.

이 작품은 우리 두 사람의 깊은 신뢰 없이는 태어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작가는 시나리오와 소설작업을 현장에서 동시에 진행시켰고, 그 시나리오를 현장에서 받아 나는 영화로 옮겼다.

그러니 작가가 촬영현장에 늘 동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또한 '축제' 는 이 작가와 나의 비슷한 경험이 배경이 됐다.

이 작가에겐 오랜동안 치매로 앓다가 돌아가신 노모가 있었다.

이게 바로 내 문제이기도 했다.

치매 초기인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나는 "과연 효 (孝) 란 것이 무엇인가" 를 두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마음처럼 안되는 게 효로구나" 하면서 안타깝던 차에 그런 효의 중요성을 영화로 일깨워주고 싶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