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남자와 겨뤄 2위 … 카레이서 탤런트 이화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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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강원도 태백에서 열린 CJ슈퍼레이스 1600클래스에서 2위를 차지한 이화선이 시상대 위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활짝 웃고 있다. [태백=임현동 기자]

1m73㎝, 53㎏. 늘씬한 몸매와 새침한 얼굴만 놓고 보면 탤런트 이화선(29·넥센 알스타즈)은 레이싱 드라이버보다는 레이싱 걸처럼 보인다.

그가 올 초 CJ 슈퍼레이스에 출전한다고 공표했을 때 수많은 남성 드라이버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화선을 동등한 경쟁자가 아니라 자동차를 몰 줄 아는 레이싱 걸 정도로 가소롭게 여겼다.

13일 강원도 태백 레이싱파크에서 만난 이화선은 ‘꽃’이나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는 이날 열린 CJ 슈퍼레이스 1600클래스에서 6명의 남성 드라이버와 경쟁해 당당히 2위를 차지했다. 챔피언은 ‘백전 노장’ 박시현(39)이었지만 가장 큰 박수를 받은 사람은 이화선이었다.

전날 열린 예선에서 3위를 차지한 이화선은 25바퀴(한 바퀴는 2.5㎞)를 도는 결선 레이스에서 16바퀴까지 선두를 달렸다. “이화선에게 지면 레이싱 판을 떠나야 한다” “레이싱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 주겠다”라고 큰소리 뻥뻥 쳤던 남자 드라이버들이 한동안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야 했다.

CJ 슈퍼레이스에서 처음 시상대에 선 그는 “내가 드라이버로 다시 태어난 날”이라며 기뻐했다. “동료에게 레이싱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봐도 웃으면서 대답을 안 해주었어요. ‘넌 몰라도 돼’라며 무시한 거죠.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겠죠.”

이화선은 연예계 선배이자 넥센 알스타즈 감독 겸 대표인 이세창의 권유로 카 레이스에 입문했다. 2004년 자동차 면허를 딴 직후였다. 그는 “도로 주행 강습을 받으면서 모터 레이싱까지 동시에 시작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일단 도전해 본 것인데 운전에 익숙해지는 것도, 오로지 자동차밖에 모르는 순수한 미캐닉들과 어울리는 것도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2006년에는 아마추어 자동차 경주에서 급커브를 돌다가 두세 바퀴 구르는 사고도 당했다. “차는 완전히 부서졌는데, 저는 걸어 나왔어요. 사고 후에 더 과감하게 차를 몰아요. 자동차 경주가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는 “제가 겉보기와 달리 겁이 없고, 큰일을 당해도 별로 당황하지 않거든요”라며 빙긋 웃었다. 본인 말대로 과감함과 침착함을 겸비했다면 카레이서로는 더없이 좋은 성격이다.


여자라 체력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시속 160㎞를 넘나드는 속도로 30분 가까이 달리면 남자도 녹초가 된다. 특히 팔이 아픈 게 문제였다. 핸들이 뻑뻑해서다. “커피를 마실 때도 악력기를 손에 쥐고 운동했어요. 그래도 안 돼서 결국 파워 스티어링 휠을 달았어요.” 엔진의 힘 중 일부를 빌려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는 데 쓰는 것이라 속도에서는 손해를 본다. 하지만 이화선은 “레이싱은 힘보다도 집중력과 마인드 컨트롤이 더 중요한 경기라 괜찮다”고 했다. 그는 “욕심을 내면 반드시 엎어지거든요. 레이싱은 다른 차를 이기는 게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이세창 감독은 “기대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까지는 선배들을 흉내내며 배웠지만 앞으로는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자라고 봐주지 않겠다는 말투다.

이화선은 레이싱을 할 땐 화장을 안 한다. “땀이 하도 많이 나서 로션도 잘 안 바른다”고 했다. 평소엔 ‘불가리’ 향수를 즐기지만 경기장에서는 “타이어 타는 냄새가 최고의 향기”라고 말했다.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거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꽃’이 아니다. 그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다.

태백=이해준 기자 , 사진=임현동 기자

◆CJ 슈퍼레이스=국내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대회. 경주용 자동차로 달리는 포뮬러 원(F1)과 달리 시판되는 차량을 대회 규정에 맞춰 개조한 자동차로 경쟁한다. 배기량에 따라 3800클래스·2000클래스·1600클래스 등으로 나눠 대회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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