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쁨] 서울 녹번동 김영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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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실직자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출근길에 오르던 날 집 앞에서 배웅하던 아내에게 그만 또 다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어준 아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 지 꼭 1년3개월만의 일입니다.

97년 말 경리부장을 맡고 있던 회사가 부도났습니다.

퇴직금은커녕 월급도 몇 달치를 못받았습니다.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의 얼굴을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잠을 못이뤘습니다.

회사에서 짐을 챙겨 힘없이 돌아오던 날 아내는 빛 바랜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18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가계부와 내가 가져다준 월급명세서 그리고 4천만원이 든 저금통장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통장에 적힌 금액을 4백만원으로 알았습니다.

재산은 제가 직접 관리했고 아내는 생활비만 받아왔기에 빠듯한 생활비에서 모을 수 있는 돈으로는 4백만원도 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장에 찍힌 액수는 4천만원이 확실했습니다.말문이 막혀 있던 저에게 아내는 "18년 전 성수동 단칸방 시절부터 단추달기.실밥따기.구슬꿰기를 했어요. 당신이 못하게 할 것 같아서 말도 못했어요. 우선 이 돈으로 생활비를 할테니 천천히 다른 일을 알아보세요" 라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손마디가 굵어진 아내의 손을 잡고 함께 울면서 재기를 다짐했습니다.

1년 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회사도 40여명의 동료들과 뒤늦게 받은 절반의 퇴직금을 모아 사원주주회사로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경리부장에서 경리이사로 승진을 했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행운의 여신입니다.

서울 녹번동 김영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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