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째 청소하고 화재점검…78세 고순낭 할머니 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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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정조임금 행궁 (行宮) 인 '용양봉저정' 과 반세기를 같이 한 고순낭 (高順娘.78.동작구본동) 할머니. 용양봉저정 옆집에 55년째 살면서 청소.화재점검 등의 관리를 무보수로 하고 있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서울동작구 본동 나즈막한 언덕위에 자리잡은 용양봉저정은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수원 현릉원으로 가는 길에 잠시 쉬어가려고 1791년 만든 행궁이다.

이곳과 高할머니가 인연을 맺은 것은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38선이 그어질 때 이북으로 편입돼버린 고향 강원도 화천을 떠나 서울로 정착하면서 산 첫 집이 바로 용양봉저정 옆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지키는 사람없이 방치된 용양봉저정은 부랑인들이 모여드는 '거지소굴' 이 돼가고 있었다.

'이웃사촌' 으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高할머니 가족들은 매일 청소하며 부랑인들이 거주하지 못하게 막기 시작했다.

그동안 화재를 발견, 불을 끈 것만도 서너차례. 6.25 전쟁 이듬해인 1954년 문화재 점검.시찰에 나선 이승만 대통령이 高할머니집과 용양봉저정 사이 담에 쪽문을 달아주라고 지시한 후 할머니의 일은 보수 없는 '공식업무' 가 됐다.

사실 용양봉저정을 향한 高할머니의 마음은 애증이 교차한다.

용양봉저정이 서울시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면서 高할머니의 집은 수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불편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보다 높게 올라가면 안된다고 해 아직도 단층집 그대로 살고 있다.

바로 옆집까지 번듯한 2층 벽돌집으로 올렸을 때는 속상해서 눈물까지 나왔다.

하지만 高할머니는 그런 답답한 마음도 용양봉저정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면서 달래곤 한다.

高할머니는 지난 3월 동작구청에 의해 지역문화재를 안내.관리하는 '문화재지킴이' 로 선정돼 매주 화.금요일에 한차례씩 내방객 안내도 하고 있다.

"원래는 지금 있는 집과 나란히 한채, 또 직각으로 한채가 놓여있어 전체적으로 ㄷ자 형태였지요. 여기는 탑이 있었고, 6.25때 폭격으로 다 소실되긴 했지만 이곳의 규모나 화려함을 보면 정조임금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어요. "

안내를 할 때는 곱게 한복까지 차려입는 高할머니는 용양봉저정과 정조임금보다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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