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힘실린 은행이사회 막내리는 '행장天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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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때 '거수기' 로도 불렸던 은행 이사회가 확 달라졌다. 은행 경영구조 개편 바람에 따라 시중은행들이 지난 2월 정기주총을 통해 비상임이사의 수가 상임이사보다 많도록 이사회 구성을 바꿔놓으면서 이사회는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구로 탈바꿈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조흥은행. 조흥은행 비상임이사들은 지난달 18일 이사회에서 은행장의 고유권한으로 여겨지던 상임이사에 대한 추천권을 이사회가 갖도록 정관을 고쳤다.

이는 은행장이 수족에 해당되는 상임이사들에 대한 인사권을 사실상 박탈당한 것으로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조흥은행 상임이사진은 "은행장이 업무집행을 책임지는 상임이사에 대한 인사권을 갖지 못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며 반발했지만 "은행장 독단을 견제하는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 는 주장을 내세운 비상임이사들의 머리수에 밀려 '항복' 을 선언하고 말았다.

조흥은행 비상임이사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14일 충북은행과의 합병주총에서 선임될 위성복 전 행장과 은행경영 전반에 관련한 양해각서 (MOU) 를 체결키로 했다.

은행장이 인사청탁이나 대출청탁을 받을 때는 즉시 이사회에 통보하고 3년간 경영목표를 제시하며 외부전문인력 채용을 의무화한다는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금융계에서는 이번 조흥은행의 양해각서 체결을 중세 영국의 '마그나카르타 (대헌장)' 에 빗대고 있다. 영국 귀족들이 힘을 모아 왕의 전횡을 막았듯이 이사회가 은행장의 권한을 제한하게 됐다는 것이다.

외환은행 비상임이사진도 녹녹지 않은 분위기다. 이사회 의장인 박영철 고려대교수는 정기주총 이후 이사회가 열리지 않자 자체적인 간담회 모임을 열 것을 요구했다.

비상임이사들은 7일 간담회를 갖고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정관개정안을 마련, 20일 이사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분기에 한번씩 열리게 돼 있던 이사회를 한달에 한번 이상 열도록 했고 은행장이 행사해온 이사대우에 관한 임명권을 삭제하고 추천권만 갖도록 했으며 임명권은 이사회의 권한으로 바꿨다.

비상임이사 중심의 이사회가 힘을 얻고 있는 데는 금융감독위원회의 뒷받침도 작용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당장 은행에 주인을 찾아주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은행경영을 자율에만 맡겨놓을 경우 '은행장 1인 독재' 라는 과거 병폐가 재발될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은행장과 이사회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은행 경영구조라는 게 금감위의 뜻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은행가에선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도 있다. 비상임이사들이 사소한 은행경영에까지 일일이 간섭하게 되면 경영진과 불필요한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다.

한편으론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한 은행에 대해 과거처럼 직접 간섭하기 어렵게 되자 이사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 금감위는 은행연합회와 함께 오는 24일 바람직한 이사회 모습을 정립한다는 취지로 원주에서 시중은행 비상임이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연찬회를 열기로 했다.

이 자리에선 비상임이사들에게 각종 교육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이사회의 위상과 관련한 토론도 벌어질 예정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의 김병연 박사는 "은행도 바뀌어야 하겠지만 비상임이사들의 책임의식도 절실하다" 고 지적했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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