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고소 많다] 카드빚 석달 밀려도 사기죄 고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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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돈을 못받으면 쉽게 고소하고, 일단 받으면 고소 취소도 쉽게 한다. " 검찰 관계자들이 고소 사건의 특성을 꼬집는 말이다. 순전히 빚을 받아낼 목적으로 내는 고소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고소 사건은 매년 10%대의 높은 증가세를 보이다 97년 다소 줄었으나 지난해 IMF사태 여파로 14% 정도 다시 늘어났다.

◇ 원인 = 사 (私) 금융이 발달한 사회적 특성에다 민사소송이 빚을 돌려받는 효과적 수단이 되지 못하는 것이 고소 남발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된다.

민사소송은 시간.비용도 많이 들고, 이기더라도 상대방이 재산을 미리 빼돌려 놓으면 승소판결문이 휴지조각이 돼 버린다.

소송과 고소의 제도적 차이 (그래픽 참조) 때문에 민사소송은 '최후의 수단' 으로 인식될 뿐이며 형사고소가 분쟁해결의 지름길로 활용된다.

고소사건에서는 수사기관이 피고소인과 참고인을 추궁하거나 계좌를 압수수색하는 등의 방법으로 혐의를 적극 찾아나서는 데 비해, 민사소송에서는 원고측이 피고에게 채무가 있음을 각종 증거를 통해 입증해야 한다.

또 검찰이 피고소인을 무혐의 처리했을 때 고소인을 무고로 처벌하는 비율이 지난해 1%에 지나지 않는 등 관대하게 처리하고 있어 고소를 쉽게 생각하는 풍조를 낳는다는 지적도 있다.

◇ 실태 = 회사원 朴모 (29) 씨는 올해초 사기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3년 동안 신용카드를 사용하다 3개월간 6백만원을 연체하자 A카드사가 고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朴씨가 3년간 성실하게 사용대금을 냈다는 점을 인정해 무혐의 처리했다.

신용카드회사 담당자는 검찰에서 "朴씨의 경우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음은 알았지만 관행에 따라 고소했다" 고 진술했다.

서울지검 형사부 검사들은 돈을 받기 위해 고소를 일삼는 '단골' 로 신용카드업체.사채업자들을 꼽는다.

서울지검 김동철 검사는 "검사실마다 고소사건의 절반 정도가 카드업체의 연체고객 고소사건과 사채업자들의 어음할인 사건" 이라고 밝혔다.

IMF사태 이후 수년간 별탈 없이 거래해 오던 사이에서 물품대금 회수가 안되면 고소하는 사례도 많다.

특히 물품대금은 전형적 민사사건인데도 형사고소를 해온다는 게 검사들의 말이다.

진행중인 민사소송에 유리한 증거를 확보하는 데 고소를 이용하는 사례도 숱하다.

金모씨는 아버지 사망 전 계모가 재산을 자기 앞으로 빼돌렸다며 그녀를 상대로 명의이전 소송을 낸데 이어 횡령혐의로 고소까지 했다.

민사소송에서 계모가 불법적으로 재산의 명의를 바꿨다는 증거를 내밀기 어렵자 검찰수사의 힘을 얻으려고 고소한 것 같다고 수사검사는 말했다.

◇ 문제점 = 고소가 남용되면서 고소제도의 원래 취지인 '범죄수사의 단서제공' 기능이 무색해지고 있다.

대법원 판례상 친고죄를 제외하고는 고소가 취소되더라도 수사를 계속해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빠른 종결을 바라는 검사들은 고소인에게 돈을 갚고 합의한 피고소인을 더이상 문제삼지 않고 무혐의 처리하는 게 관례처럼 돼 있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권력이 개인간의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해 주는데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낭비하는 것이다.

지난해 검사 1명당 한달 평균 처리 피의자 (3백43명) 중 22%인 76.3명이 고소 피의자였다.

서울지검의 6개 형사부 검사들이 처리한 사건 가운데 고소사건은 48%나 됐다.

서울지검 형사6부장 김회선 부장검사는 "이해당사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고소 사건은 일반 인지사건 40~50건을 처리하는 시간과 품이 들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의 90% 이상을 고소사건에 매달린다" 고 말했다.

고소 사건의 80% 이상이 무혐의 처리되는 상황에서 피고소인의 인권침해 문제도 심각하다.

일단 고소를 당하면 피의자로 자동 입건되기 때문에 무혐의가 돼도 고소당한 기록이 남게 되고, 다른 사건에 연루됐을 때 불리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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