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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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1)나는 액션체질

완성도와 상관없이 '돌아온 왼손잡이' (68년) 는 지금도 꽤 정이 가는 작품이다.

데뷔 이후 7년간 무려 23편. '두만강아 잘 있거라' 부터 '몽녀 (夢女)' 까지 한해 평균 3작품 이상을 쏟아 내던 남작 (濫作) 의 세월이었다.

전쟁물.사극.액션.스포츠.입체영화 등등. 섭렵한 장르도 참으로 다채로웠다.

이런 무지막지한 실험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나는 '돌아온 왼손잡이' 에서부터 받기 시작했다.

액션영화로 치자면, 지금까지 했던 어떤 작품보다도 이 영화는 체질에 맞았다.

내 액션영화에 배어있던 특유의 분위기와 체취가 점차 애정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 담긴 부평초 (浮萍草) 같은 사나이들의 우정과 애환. 그것은 젊은시절 내 인생의 한 조각이기도 했으니 감정이입이 그만이었다.

'돌아온 왼손잡이' 에는 당대 최고의 액션스타였던 박노식과 허장강, 그리고 여배우로는 김지미가 출연했다.

감독인 내 자신이 흡족한 이야기인데다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최정상의 출연진까지 합세했으니 흥행은 떼논 당상이었다.

서울.지방업자 모두가 만족한 빅히트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 작품에서 김지미씨는 계략에 의해 외항선 선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 직전에 있는 주인공 (박노식) 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김지미는 빼어난 미모에다 연기력까지 겸비해 맘껏 관객들의 환심을 샀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외항선 잡배 (雜輩) 들의 모략으로 수장 (水葬) 위기에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인공과의 극적 상봉 장면에서 김지미의 연기는 비장미를 풍겼다.

물론 나와 김지미씨와의 만남은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김씨와의 첫 만남은 정창화 감독의 '사랑이 가기전에' 조감독을 할 때였다.

당시 20대 초반, 혈기왕성한 젊은 조감독의 눈에 비친 김씨의 첫 이미지는 수려한 외모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월을 두고 몇 작품을 함께 만들면서 나는 점차 연기에 눈을 떠가는 김씨를 보고 대단히 좋은 연기자란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온 왼손잡이' 이전까지 김씨와 주로 사극을 많이 했다.

'왕과 상노 (常奴)' (65년) '닐리리' (66년) '망향천리' (67년) 등을 예로 열거할 만한 작품들이다.

'돌아온 왼손잡이' 에 얽힌 일화 하나가 또 있다.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둘 무렵,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영화판의 질긴 연줄이 모습을 숨긴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 그 인연의 주인공이었다.

90년 '장군의 아들' 을 찍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이랬다.

당시 액션영화를 좋아하던 20대 청년 이사장도 '돌아온 왼손잡이' 을 흥미있게 본 모양이었다.

이때 이사장의 기억이 20여년만에 발동, 나에게 강권하다시피해서 만든 액션영화가 '장군의 아들' 이었다.

90년초 이사장으로부터 '장군의 아들' 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액션영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까맣게 잊고 있던 옛날 기억을 떠올려 "그때 임감독의 액션에 매료됐다" 며 은근슬쩍 하는 이사장의 간청을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영화의 기획.제작자의 능력이란 게 이런 식으로도 발휘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푸 3편까지 나온 '장군의 아들' 의 탄생 비화는 이랬다.

어쨌든 '돌아온 왼손잡이' 의 성공은 당시 나를 액션영화 전문으로 몰았다.

이럭저럭 감독의 경력은 날로 불어났지만, 제작자의 요구에 따른 주문생산은 여전히 계속됐다.

69년 6편, 70년 8편, 71년 7편. 나는 3년간 무려 21편을 찍었다.

제작자는 장사를 위해 늘 스타의 얼굴이 필요하던 시절, 69년 만든 '십오야 (十五夜)' 란 액션물에는 가수 남진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아무리 웬만한 영화도 흥행을 하던 호시절이라고 해도 그 저급한 수준의 다작은 후안무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글=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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