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하심(下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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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뭐라더라. 예수는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마저 내놓아라" 고 하고, 석가는 "맞았을 경우 병신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고 했다던가.

세속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절에 들어온 초심자를 행자 (行者) 라고 부른다.

행자가 가장 먼저, 그리고 자주 만나는 절 집의 용어는 '하심 (下心)' 이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마음 공부' 라는 정도의 뜻이다.

이 하심을 위해 행자는 부엌에서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만드는 등의 천한 일을 한다.

세상을 건질 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완전히 낮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듣게 된다.

***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짐'

사람은 누구나 위에 오르고 싶어한다.

일등이 되고 싶어한다.

높은 자리에 앉고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일한다.

한 분야에서의 일등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도 다른 분야에서는 일인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설사 공부나 일을 싫어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는 노는 분야에서나마 남들보다 앞서려 한다.

사랑을 포기한 이도 재물에서는 높이를 지키려 하고, 세속 그 자체를 포기한 이도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그냥 서 있지 않다.

자신을 높여야 한다는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큰 인물들이 참석하는 중요한 행사에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자리 배치다.

앞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 뒷자리에 앉고, 먼저 소개해야 할 사람이 나중에 소개되면 그 당사자들은 모욕감을 느낀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라의 최고 지도자와 같이 한 자리에는 아예 참석자들에게 서열 번호가 부여된다고 한다.

같은 사람이 다시 초청받더라도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 가면 서열 번호는 까마득히 뒤처진다.

내가 나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뻔뻔스러워야 한다.

남보다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독하게 마음먹고, 그에게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

아울러 음모를 꾸미고 지략을 펴야 한다.

어떤 이가 나를 높이 오르도록 돕는다면, 그로 인해 그가 받는 이익이 어떤 것들인지를 쉽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높이 오르기 위해 억지를 쓰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멋쩍은 일인가.

왜 우리가 높이 올라야만 하는가.

자신을 높이 올려야 한다는 저 짐을 내려놓아 버리면 되잖나. 그래, 석가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긴요한 메시지가 바로 저 짐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주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헐떡일 것이 없다.

자기를 올리지 않으면 아래로 떨어질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두려워 할 것도 없다.

*** 바다는 낮기에 큰물 담아

한데 우리 범부 중생에게 있어 저 짐을 내려놓는 일, 즉 하심하는 일이 쉽지 않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현실을 보다 살기 좋은 이상세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수 있다.

진짜 하심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법화경은 하심하는 보살행의 예를 보여준다.

상불경보살은 누구든지 만나기만 하면 "어른께서는 장래에 반드시 궁극의 지혜와 자비를 얻고 펴는 위대한 인물, 즉 부처가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한다.

상대가 "나는 그런 것 필요 없으니 미친 소리 지껄이지 마라" 고 하면서 작대기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면 도망치면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열반경도 하심 수행의 예를 소개한다.

상대를 높여 주는 말을 해주어도 상대가 성을 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상대의 종이 돼 상대를 받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이것이 일생에 끝나지 않고 상대가 그를 알아주게 될 때까지 무한생을 계속한다.

요즘 한 방송사는 "칭찬하자" 는 운동을 펴고 있다.

내 욕심으로는 "상대를 높여주자" 로 한 단계 더 높였으면 하지만, 저나마도 상대를 존중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된다.

계곡은 낮아서 물을 모으고, 바다는 더 낮아서 큰 물을 담는다.

높여 준 산꼭대기와 육지는 끊임없이 물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보낸다.

나를 굽히고 낮춰보자. 참기 어려운 굴욕을 삭여보자. 그러면 저절로 흘러 내려오는 그 무엇이 있다.

釋之鳴 청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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