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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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호 33면

국무총리는 왕조 시대의 재상에 비견할 자리다. 재상은 흔히 ‘군주를 보필하고 행정을 책임지는 2인자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말만 2인자일 뿐 실제로는 군주의 힘과 야심에 따라 세력과 역할이 제각각이었다. 군주가 강하면 고개를 숙이지만, 약해지면 언제라도 틈을 비집고 자기 세력을 키우는 게 그 자리의 특성으로 통해 왔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고대 중국의 진(秦)·한(漢) 시대에는 황제를 보좌하고 백관을 통솔하는 승상(대사도), 군사를 맡은 태위(대사마), 감독관인 어사를 통솔하는 어사대부(대사공)의 삼공이 여기에 해당했다. 황제가 힘을 세 명에게 나눠주고 서로 견제하게 한 흔적이 엿보인다.

당나라에선 정책을 기획하는 상서령, 검토하고 법을 만드는 문하시중, 이를 실행하는 중서령이 그 역할을 했다. 오늘날 행정학·경영학에서 말하는 plan-do-see(기획-집행-감사)의 기능을 분리해 신하들의 힘이 한군데로 집중되지 못하게 한 제도다. 황제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려고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문하시중과 중서령을 합쳐 동중서문하평장사라는 막강한 자리가 생긴 것은 황권(皇權)의 약화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남송과 원나라에선 승상 자리가 부활했지만 황제의 자문에나 응할 뿐, 실권은 없었다.

그나마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재상에 해당하는 중서령 자리를 아예 폐지해버렸다. 대신 황제 비서인 내각대학사 자리를 신설했다.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6부를 직접 관할해 ‘황제 독재’를 했다. 내각대학사는 최고위 관직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힘이 없었다. 청나라 때는 군기대신이라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황제의 개인비서였다. 청나라는 멸망 직전인 1911년, 황권이 유명무실해지자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제도를 도입해 내각총리대신이란 관직을 만들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그 자리를 맡아 세력을 키웠다.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도 이 제도를 도입했다. 중화민국 임시약법에 ‘임시대총통이 내각 수장인 내각총리를 임명하도록 한다’고 규정했다. 임시대총통이 마음대로 임면할 수 있어서 그런지 총리는 처음부터 만만한 자리였다. 1912년 한 해에만 네 명이 연이어 임명됐다. 22년에는 1년간 무려 여섯 명이 교체됐다. 26년에도 다섯 명이 명멸했다. 14년간 무려 43명이 이 자리를 거쳤다. 명칭도 툭하면 바뀌었다. 1914년 정사당국무경, 16년 국무총리로 이름이 각각 바뀌더니, 28년 행정원장이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격하됐다. 총리 자리에서 드러나는 중화민국의 혼란상이다.

신중국에선 달랐다. 건국 초인 49년 정무원 총리 자리가 신설됐으며 54년부터는 국무원 총리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이어 영원한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첫 번째 정무원 총리이자 국무원 총리다. 그는 49년부터 76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원자바오 현 총리는 겨우 여섯 번째다.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국회 임명동의를 받아 취임하면 제40대가 된다. 서리와 권한대행은 제외한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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