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TV드라마 할아버지·할머니가 없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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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에서 할아버지.할머니의 푸근한 웃음이 사라지고 있다. 본지가 1999년부터 매년 8월 방영분을 기준으로 방송 3사의 TV 드라마 132편을 분석한 결과 '브라운관 속 세상'의 노인들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증가 추세인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할아버지가 먼저 '퇴출'=99년 8월 방영된 22편의 드라마 중 할아버지.할머니가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모두 12편으로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현재 방송 3사가 방영 중인 드라마 22편 가운데에선 고작 6편뿐이다. 5년 사이에 반으로 줄었다. 특히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드라마는 단 한편이다. 90년부터 방영한 KBS1-TV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과수원집 박덕보(김성겸)할아버지만 살아남았다. 또 99년에는 노인 배역이 부부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04년 8월 현재 노인 부부는 물론이고 한 드라마에 할아버지.할머니가 함께 등장하는 사례조차 아예 없다.

특히 할아버지 역은 퇴출 대상 1호다. '대추나무 …'를 제외한 드라마는 처음부터 할아버지 역을 설정하지 않았다. MBC '왕꽃선녀님'에 할머니가 두명(사미자.정혜선)이나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할머니의 경우 손자를 돌보거나 집안 대소사에 참견하는 등 할아버지에 비해 나름대로 '역할'이 있기 때문이라고 방송가에서는 분석했다.

◇시청률 경쟁, 제작비 압박 탓=노인 배역이 감소하게 된 것은 시청률 경쟁과 제작비 압박 탓이 크다. 각 방송사가 드라마에 '올인'하면서 주역을 맡는 스타급 연기자의 몸값이 회당 1500만원에 이르는 등 천정부지로 올랐다. 김종식 KBS 드라마 팀장은 "드라마 편당 제작비가 한정돼 있다 보니 조연 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할아버지.할머니 역을 맡는 경력 30년 이상의 연기자는 대부분 출연료 최고 등급인 18등급이다. 한 장면에만 나와도 회당 150만원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할아버지 한명을 줄이면 젊은 주인공의 친구 2~3명을 더 등장시킬 수 있는 셈이다. 한 방송작가는 "제작비가 적은 단막극의 경우 원래 대본에 있던 노인역을 PD가 임의로 빼버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10~20대가 드라마 주 시청자층인 것도 원인이다. 이들의 구미에 맞게 20대 초반의 젊은 주인공 위주로 장면을 구성하다 보니 자연히 나이 든 등장인물은 설 땅이 없어지는 것이다. MBC '황태자의 첫사랑' 인터넷 게시판에는 "주인공들의 부모가 등장하는 장면을 안 줄이면 채널을 돌리겠다"는 글이 여럿 올라와 있다.

◇현실 반영인가, 현실 외면인가=이미 사회는 핵가족화됐다. 3대가 한집에 모여 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병학 한국방송연기자협회 고문은 "은퇴한 가장이 가정에서 큰 역할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허구의 세상에서까지 퇴출당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함께 살지 않더라도 할아버지.할머니는 세상에 존재한다. MBC 장근수 CP도 "할아버지.할머니가 등장하면 드라마의 리얼리티가 확 살아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03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75.5세, 노인 인구는 분명 증가 추세다. 그러나 드라마 세상에선 시청률과 제작비라는 피리 가락을 따라 하멜룬의 아이들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분석했나=KBS1.KBS2.MBC.SBS-TV가 99년부터 매년 8월 방영한 드라마를 분석했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와 비교량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서다. MBC '베스트 극장' 같은 일회성 단막극은 매회 등장인물이 바뀌기 때문에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할아버지.할머니의 연령 기준은 경로우대증을 발급받는 65세 이상. 노인 배역의 나이가 명시되지 않은 경우는 드라마상 손자의 나이 등을 근거로 추정했다. 단역 등 극중 비중이 작은 경우는 셈하지 않았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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