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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 거부'에 편견 버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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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인간은 사유의 능력을 들어 자신을 동물과 구분한다. 사유의 이상적인 형태는 이성이며, 인간은 이성을 통해 불완전하지만 많은 것을 이뤘다. 인간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능력을 종종 포기하기도 하는데, 편견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편견이란 타자에 대한 사유를 거부하는 것이며, 인류의 역사는 이런 거부가 끔찍한 재앙을 낳았음을 보여준다. 중세 유럽에서는 신의 권위를 빌린 편견으로 수많은 사람이 신.구교 간의 종교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 경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력이 난무한 뒤 타자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편견이 가져온 재앙은 종교전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편견이 낳은 가장 커다란 비극은 아마 유럽 유대인의 슬픈 운명일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예수를 죽인 배은망덕한 민족'인 유대인은 유럽에서 2000년 동안 박해를 받아야 했다. 박해는 결국 히틀러의 독일에서 인종 절멸의 시도로 귀결됐다.

편견은 끈질긴 생명력이 있으며 모든 인간사회에 만연해 있다.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유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사회적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도 편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병역 거부는 일단 '정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며, 사회는 '비정상'과의 대화 대신 편견을 택한다. 그 결과 국가안보론과 더불어 병역 의무의 고충과 형평성 문제, 다른 기독교 종파의 병역 의무 인정, 양심적 병역 거부의 악용 가능성 등 '정상'의 테두리 안에 있는 주제만이 논의된다. 편견의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기와 살인을 거부하는 교리와 이념에 내재하는 반폭력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함의는 논의의 장에 설 자리가 없으며, 개인의 자유와 체제 유지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논의 역시 상대적으로 가볍게 처리된다.

그러나 편견에 사로잡힌 논의가 갖고 있는 더 큰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병역 의무의 거부는 형사상 처벌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기독교가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중세 유럽에서의 파문이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이 병역 의무 대신 이러한 처벌을 택한다. 이를 바라보는 사회는 왜 이들이 이러한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최근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유죄로 판결했으나 다행스럽게도 13명의 대법관 중 6명이 대체복무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라는 법적 가치를 염두에 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법적 가치가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와 고통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기를 기대해 본다.

윤용선 한국외대 외국학종합연구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