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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회의 시간을 늘렸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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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가능하면 짧게 할수록 좋다!’ 요즘 이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회의시간을 늘여? 감히 누가 이런 무모한 짓을?’ 황농문 교수정도니까 봐주지 나였다면, 언감생심, 진즉에 몰매 맞고 말았을 지 모를 일이다.

회의? 사실, 회의는 상당히 피곤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비슷비슷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야 하기도 하고, 결론도 쉽게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회의 혐오론자’다.

회의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기보다 밑도 끝도 없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회의를 싫어한다고 봐야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류의 회의 혐오론자들, 아주 많다. 아니, 어쩌면 전부일 지도 모를 일이다.

회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이처럼 만연한 마당에 회의시간을 늘이는 행위는 분명 파격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더 나은 결과를 얻으려고 회의시간을 늘인다? 이해 못할 노릇이다. 하지만 황 교수는 회의를 늘인 결과 부수적으로 얻는 것이 더 많아졌다고 분명히 말한다. 뭘까? 그건?

‘개별적으로 지시를 내려 실험을 진행하는 편이 당장은 시간을 절약하는 데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생들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지 충분히 공감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험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 교수의 지적이다. 조금 더 들어보자.

‘결국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실험결과가 나오고, 학생들이 그 방향이 옳은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은 하게 되겠지만, 충분히 이해를 한 상태에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지는 의문이다.’ 옳~타꾸나! 올바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당장은 시간이 더 걸리고, 또 시행착오도 감수해야 하지만,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단다. 회의시간이 길어진 관계로, 요즘은 각자가 실험 진행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당면한 문제에 관해서도 충분히 설명을 하고, 토의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실험방향도 제시되고 도상 검증도 이뤄진다.

결론이 나올 즈음 또는 아무리 토의를 거듭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을 무렵, 황 교수가 무대에 오른다. 짜~안! 그리고 정답에 가까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면, 제자들의 반응은? ‘아! 맞아! 저런 해법도 있구나!’ ‘‘에찌 있는’ 결론이란 게 바로 저런 걸 말하는구만!‘ 하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아닌가!?

대략 이 단계에 오면, 랩 구성원 대부분이 비교적 명백해진 결론을 공유하고 목표도 분명해지면서, 랩에는 일종의 ‘집단몰입’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왜 이 실험을 해야 하는지,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지, 속으로 회의하는 심적 낭비요인이 많이 사라진 결과다.

남은 것은? ‘불타오르는 것’밖에 없는 상태라고나 할까. 역시 몰입의 대가다운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그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라는 ‘개인적 몰입’을 넘어서 ‘집단적 몰입’까지 시도하다니 말이다!

또 다른 이점으로는 수평적 정보교류가 눈에 띠게 늘어났다고 한다. 예전에는 같은 랩에 있으면서도 남이 무슨 실험을 하건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내용을 아니까 관심이 생겨서 평상시에 의견도 자주 주고받고, 어려움도 함께 나누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각자의 역량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 예전에는 개개인의 역량을 황 교수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어떤 역량을 가졌는지 서로 잘 알기 어려웠고, 그래서 별로 자극도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회의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밑천이 두둑한 선수들과 밑천이 짧은 선수들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또는 안 했다가 라이브로 드러나는 생생한 삶의 현장, 회의시간! 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연히 선의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주 회의에서 공부가 미진해 개망신을 당했다면, 다음 주 회의에서는 만회하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 그 팽팽한 긴장은 당연히 랩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황 교수가 과거에 택했던 방식은 ‘부채살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주군을 중심으로 1대 1의 관계로 맺어진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고, 그들 간에는 소통조차 감히 하지 못하는 은근 치열한 관계! 그 속에서는 실력이 없어도 비비는 것으로만 승부하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디어 가로채기를 해도 정작 교수는 알 수 없는 상황도 물론 있었을 테고.

반면에, 황 교수가 새롭게 택한 방식은 ‘다이아몬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곳을 딱히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조직. 하지만, 개체 간에 등가의 거리에서 의견교환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는 조직. 아이디어의 주인이 누군지 분명하데 드러나는 조직. 주군조차도 중심이기는 하되 많은 점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조직. 이 속에서는 당연히 줄보다는 실력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긴 회의는 이 ‘다이아몬드 리더십’을 보강해주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다이아몬드 리더십’을 지향한다고 해서 무조건 회의 시간을 늘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회의가 그저 상사의 시간이나 때우는 또는 지시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생산적일 수 있다는 점을 재인식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음~ 뭔가를 먹으면서 회의를 한다면, 더‘ 생산적일 수도 있겠다! 하다 못해 근수라도 늘 수 있으니...

황 교수의 시도를 보면서 나도 회의시간이 길어지면 자폭하고 마는 성질 급한 고등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더 들어보고, 더 짜내보고, 더 보태보고. ‘들짜보 운동’으로, 몰입 한번 해보자꾸나! 새로운 좌우명이다.

여러분들도 회의시간을 늘여보기 바란다. 공감하는 장, 각자 갈고닦은 기량을 한껏 보여주는 장, 무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장이라면, 긴 회의는 절대 금기가 될 수 없다.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 긴 회의 만쉐이~!

(※속기록 부가기록 : 여기저기서 ‘안~돼!’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들림. 서류를 던지는 놈들도 있음. 하지만 입 꼬리가 묘하게 올라가는 분들도 계심. 선덕여왕, 미실의 영향? 이 박사 급히 몸을 피함. 그 분들 뒤로...)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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