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책넘나들기]'체첸 : 카프카스의 재앙'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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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체첸 : 카프카스의 재앙' (Chechnya:Calamity in the Caucasus) , 뉴욕대출판부. '체첸 : 러시아 권력의 무덤' (Chechnya:Tombstone of Russian Power) , 예일대출판부.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 에서 냉전 해소 이후 문명간의 충돌이 세계적 갈등의 주류가 될 것을 전망했다.

90년대 들어 이슬람권과 기독교권 사이의 발칸과 카프카스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난 것을 보면 문명권 사이의 단층대를 충돌의 초점으로 본 그의 예상이 맞는 것 같다.

르완다와 브룬디 역시 남아프리카계 후투족과 북아프리카계 투치족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헌팅턴의 해석을 적용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곳의 분쟁이 해를 거듭하는 양상을 보면 이 단순명쾌한 설명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알바니아계의 코소보지역에 대한 세르비앙의 호전성은 이슬람계의 보스니아에 비해 전혀 약하지 않다.

이라크 후세인의 이슬람 연대 호소는 별 호응을 받지 못하는 한편 이스라엘은 터키와 강력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문명권 차원이 아니라 민족주의 차원에서 접근할 일일까. 그래서 '신 민족주의' 논의가 무성하다.

냉전체제에 파묻혀 있던 민족주의가 냉전의 해소에 따라 표면으로 불거져 나온다는 것이다.

옛 소련과 유고연방에서 90년대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수긍이 가는 관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국경을 낮추거나 무너뜨리는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의 부활을 일반적 현상으로 논하기에는 어색한 점이 있다.

세계화와 신민족주의 사이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향을 일반화하는 논의보다 지금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구체적 사례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저널리스트들이 체첸전쟁을 정리한 두 권의 책은 체첸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 좋은 안내가 된다.

칼로타 골과 토머스 드윌의 공저 '체첸 : 카프카스의 재앙' 은 정통적 전쟁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94~96년의 체첸전쟁을 취재하며 모은 정보에 그 후의 조사와 인터뷰를 덧붙여 거대하고도 정교한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다.

그 그림은 전쟁터의 영웅주의와 참상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경제와 사회 속에서 체첸의 석유와 체첸계 갱단이 가진 의미까지 포괄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사실주의를 지향한 것이다.

애너볼 리븐의 '체첸 : 러시아 권력의 무덤' 은 역시 종군기자가 쓴 책이면서도 정치학적 해석에 비중을 둔 것으로, 세계적 분쟁현상의 사례로서 체첸사태를 이해하는 데는 더 직접적인 참고가 된다.

리븐의 관심은 체첸보다 러시아에 있다.

전쟁 자체가 체첸 민족주의의 새삼스런 발흥보다 소련체제의 붕괴로 인한 권력공백상태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니 문명충돌론이나 신민족주의론의 한계를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책이라 하겠다.

리븐의 관점은 근년 소장학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다.

이들은 문명의 전통이나 민족주의가 국제관계 속에서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더 중요한 요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질서의 확장과정이다.

냉전의 뒷받침을 받던 권위주의체제가 곳곳에서 무너진 뒤 새로운 질서를 도입할 기본구조가 없는 상황에서 이미 철지난 민족주의가 편의를 위해 동원되는 작금의 현상은 오래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구조가 취약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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