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영화판, 징하요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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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92년 여름, 충무로는 '장군의 아들' 이후 나의 다음 작품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제작사인 태흥영화사측은 그 작품이 조정래 원작소설 '태백산맥' 이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발표했고, 매스컴들은 한국영화 최초로 1억원대의 원작료를 기록한 작품이 나왔다고 떠들썩 했다.

작품의 규모와 주제가 주는 무게 때문에 '감독과 영화사의 일대 야심작이 될 것' 이라는 소리들도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그러나 8월에 접어들면서 슬그머니 제작이 보류되고 말았다.

정부쪽에서 예기치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온 탓이었다.

"다 지나간 이야기라 말하긴 뭐하지만….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리기에는 시기가 적당치 않아요. " 얼마후 이태원 (李泰元) 사장이 털어놨다.

그때는 6공화국 말기였다.

나는 제작진과 상의해 '태백산맥' 의 촬영을 대통령선거가 끝나는 93년 3월 이후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진행하는 게 어쩌면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일로 의기소침해 있을 때 李사장이 다시 나를 불렀다.

"그 사이 완성도 높은 작품 하나 만들어 보세요. 돈 생각말고…. 이왕이면 예술적인 알뜰한 작품을 한번 해봅시다. 내년 칸영화제에 한번 내보내게 한국적인 것으로… " . 나는 사실 그때 지쳐있었다.

4년 8개월동안 액션영화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찍으며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이었다.

이런 처지를 알아차렸는지 李사장은 '마음의 빚' 을 갚는 심정으로 내 귀를 번쩍 뛰게 하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난 뒤 나는 李사장과 함께 대학로를 찾았다.

이미 TV에서 본 오정해를 '태백산맥' 에 쓸 배우 (새끼무당 '소화' 역) 로 내심 작정했던 터라 吳양이 출연하는 연극 '하늘天따地' 를 보고 싶었다.

나는 대학로로 향하며서 줄곧 오정해를 떠올렸다.

"맞아, 그애가 판소리를 한다고 했지. " 순간 나는 오정해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그 잊었던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 를 떠올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吳양은 목포출신으로 국악예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한국음악과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즈음 오정해는 친부모처럼 믿고 의지하던 인간문화재 김소희 선생으로부터 파문 일보 직전에 있었다.

'정성을 다해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한데 눈을 돌린다' 는 지엄한 꾸지람이었다.

춘향대회 참가도 언짢았는데 연극이라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 김소희 선생은 오정해와 얼굴도 맞추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李사장과 연극을 보고 1주일쯤 지나 다시 태흥영화사를 찾았다.

"이걸로 영화 한번 해봅시다" .소설 '서편제' 의 줄거리를 대략 설명하자 李사장은 "그러자" 며 흔쾌히 대답했다.

"한을 넘어서는 소리라는 점에서 눈물겹도록 애절한 점은 있겠어요. '서태지' 류의 감각적인 것만 판을 치는 세상이니 좀 색다른 게 있어도 좋지요" . 나는 다음 작품이 '서편제' 로 정해지자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나는 맨먼저 연극배우 김명곤을 찾았다.

90년 동학을 소재로 한 대형사극 '개벽' 에서 만났을 때 칼춤을 추는 녹두장군역의 김명곤이 판소리를 잘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김명곤은 74년부터 10년간 박초월 선생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고 '뿌리깊은 나무' 의 기자로 있으면서 잡지사가 주최하는 수많은 판소리 강연도 관심있게 들은 터였다.

나는 그에게 '서편제' 의 주인공 '유봉' 역과 각색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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