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정책혼선…무엇이 문제인가] 국정혼선 사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자병용 논란, 국민연금 확대시행 파문, 의약분업 연기, 미전향 장기수 송환 이견,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탈퇴 등을 둘러싼 국정난맥사건들이 모두 한달새에 발생했다. 하나같이 국민생활과 직결된 개혁과제들이다.

집권 말기에나 있을 법한 이런 혼선은 국정통합시스템의 고장과 '정책 컨트롤 타워 (사령탑)' 의 부재 (不在)가 주원인이다.

관계부처간.당정간 사전조율도 하지 않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주요 정책이 충분한 사전검토없이 성급하게 발표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

이런 탓에 막상 문제가 불거지면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국민연금 확대시행에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국민회의는 "몇번이나 보건복지부에 이상없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며 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을 탓했다.

여당의 정부견제와 정책검증 기능에 장애가 생겼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국민회의 지도부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에게 건의한 의약분업 연기는 거꾸로 정부쪽에서 불만을 터뜨렸다.

복지부는 "7월 시행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여당이 표를 의식해 이익단체의 압력에 굴복했다" 고 비난했다.

한자병용이나 미전향 장기수 송환을 둘러싼 부처간 이견은 사전협의가 충분치 못한 데서 비롯됐다.

한자병용의 경우 관계부처인 교육부와 행정자치부 장관도 국무회의에 들어가서야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다. 국민회의 지도부는 신문을 보고서야 알 정도로 소외됐다.

또 통일 및 대북관련 문제는 통일부가 앞장서고 법무부가 "법질서를 무너뜨린다" 며 반대하는 것이 상례 (常例) 다.

그런데 장기수 북송 (北送) 문제는 거꾸로다. 법무부가 검토방침을 발표하고 통일부가 불만을 표시하는 형국이다. 강인덕 (康仁德) 통일부장관은 국회에서 "사전협의가 없었다" 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사정위의 경우 정부쪽의 비협조로 위상약화를 감지한 국민회의가 양대노총의 탈퇴라는 극한상황을 예견하고 정부에 태도변화를 거듭 촉구했으나 번번이 외면당했다.

정부가 국민회의의 제안을 수용했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때였다. 이를 두고 국민회의는 "관료사회가 의도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이밖에 인권위원회 설치문제는 위원회 위상을 놓고 몇달째 법무부와 국민회의가 이견을 조정하지 못해 표류하고 있는 사례. 대통령 눈치만 보면서 누구도 결론내리기를 꺼려 金대통령이 최근에야 가닥을 잡아줬다.

국민연금문제는 金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질책하고 나서야 비로소 당정이 방향을 잡았을 정도다. 국정 통합시스템의 기능중지상태는 결국 대통령만 혼자 뛰게 되는 기형적 국정운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권이 너무 '입에 단' 이야기만 좋아하는 것도 국정혼선을 부채질했다는 비판도 있다. 최근 악성 유언비어까지 나돌 지경이 된 지역감정 악화문제는 이미 지난해 중반부터 감지됐던 사안이다. 언로 (言路)에 동맥경화가 생기면서 증세가 악화될 때까지 방치된 셈이다.

이상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