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철밥통의 국제 비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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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에게 '철 (鐵) 밥통' 이 있다면 일본에는 '철의 트라이앵글' 이 있다.

니혼게이자이 (日本經濟) 신문이 94년에 장기 연재물 '관료' 를 실으며 쓴 말로 정.관.재계의 3각 구조 먹이사슬을 이르는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낙하산 인사' 가 일본에선 '아마쿠다리 (天下り)' 다.

미국 말로는 '리벌빙 도어 (revolving door)' 가 사촌쯤 된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일본의 낙하산 인사와, 빙빙 돌아가는 '회전문' 을 통해 공직과 민간요직을 오가는 미국의 인사교류는 그 뜻이 좀 다르다.

일본에선 아마쿠다리 백서 (白書)가 있을 만큼 낙하산 인사의 못된 구석이 큰 문제가 된 지 오래다.

미국의 회전문도 "계속 드나들며 잘 먹고 잘 산다" 고 빈정거릴 때 주로 쓰이지만 인재들을 그만큼 잘 활용한다는 뜻도 있다.

'스폰서' 라는 우리 표현에 맞는 일본.미국 말도 한번 찾아보자. 심재륜 (沈在淪) 전 고검장이 항명 파동 속에 물러날 때 후배 검사들 사이에 돌던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술자리에는 세 가지가 없었다는 거 아니야. " 이들이 말한 세 가지 가운데 둘은 스폰서와 안주다.

공직자의 술값 등을 대주는 사람을 스폰서라 하니까,沈씨는 법조계의 질긴 먹이사슬 속에서도 다른 사람과 견주어 깨끗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 먹이사슬의 연결 고리는 '셋타이 (接待)' 다.

'파트론' (Patron) 이란 말도 있다.

고시에 붙어 엘리트 소리를 듣는 관료가 되면 평생 의리를 지키며 먹고 사는 돈을 해결해주는 파트론들이 붙는다.

우리네 스폰서보다 세다.

미국에선, 글쎄, 로비스트라는 말을 갖다 대면 맞을까. 워싱턴 백악관에 가장 가까운 호텔 가운데 하나인 윌러드 호텔의 한쪽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걸려 있다.

"18대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 (재임 1869~1877) 은 일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이 호텔 로비에서 브랜디를 마시며 시가를 피우곤 했다. 이게 널리 알려지자 많은 권력 브로커들이 접근했고, 이들을 그랜트 대통령은 '로비스트' 라 불렀다. " 그랜트 대통령은 거리낌없이 선물을 잘 받다가 결국 금 투기꾼 두 사람의 로비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건 백악관 공식 웹사이트에 떠있는 기록이다.

이처럼 밥통과 먹이사슬은 어디를 가나 다 있다.

미국 사회의 진짜 깊은 속내와 뒷골목 질서를 아는 이들은 "미국도 결국 들어가보면 돈이다" 고도 말한다.

사람 사는 게 똑같지 날 때부터 금테 두른 국민이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금 투기꾼에 넘어갔던 미국은 이후 회전문은 열어 놓되 먹이사슬은 계속 조이고 고쳐 왔다.

로비스트들은 로비공개법 (LDA) 과 외국에이전트등록법 (FARA)에, 공직자들은 엄격한 윤리규정에 묶여 있다.

시민단체 (NGO).언론이 이들의 밥통을 감시하고 인사청문회와 특별검사 제도가 불법 먹이사슬을 끊는다.

어떤 때는 좀스럽기까지 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유엔 대사로 지명한 리처드 홀브룩 전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끈질긴 비리 조사 끝에 이달 초 5천달러의 벌금을 내고서야 겨우 인사청문회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차관보를 그만두고 금융회사에서 일할 때 '공직을 떠난 뒤 일정 기간이 지나야만 현직 관리들과 접촉할 수 있다' 는 규정을 어기고 서울에서의 리셉션에 당시 주한 미 대사를 초청했다는 혐의였다.

정부조직 개편안이 곧 나온다고 한다.

부패 척결은 여전한 과제다.

다 효율을 올리자는 일인데, 조직 개편을 하는 사람이나 개편을 당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명심할 것은 먹이사슬을 제도로 옳게 엮어놓지 않으면 관료들은 일 안하거나 그르치는 것으로 보복한다는 사실이다.

점잖게 말하면 합리적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요, 까놓고 말하면 떳떳하게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사회안전망 없는 실업이 사회를 엎듯, 무작정 밥통만 깨겠다는 정부 개편은 되지도 않을 뿐더러 나라 일을 밑둥에서부터 갉는다.

국민의 정부에서도 재경부 장관이 낙하산 인사를 하며 "조직의 피로를 풀어줘야만 했다" 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와 스폰서. 좀스럽기까지 한 법 울타리를 쳐놓고 회전문은 얼마든지 열어놓는 미국 사회와 로비스트. 아무리 문화의 차이가 있다지만 어느 쪽 먹이사슬이 더 옳은가.

김수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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