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정책 미국의 고민]빛바랜 '제네바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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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한에 '줄 것은 주고, 얻어낼 것은 얻어낸다' 는 일괄타결안을 우리 정부가 공식화함에 따라 한반도 정세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이번 정책의 성공여부는 근본적으로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미국과의 공조를 얼마만큼 이룰 수 있느냐도 주요변수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윌리엄 페리 북한정책조정관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대북 (對北) 정책안을 준비 중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북한의 입장은 물론 미국 의회 등을 두루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을 담기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페리 조정관을 비롯한 미국정부의 고민은 무엇인지, 미국 평화연구소 (USIP.소장 리처드 솔로몬 전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등 연구기관들과 북한문제 전문가 15명을 만나 직접 들어보았다.

◇ 빛 바래는 북.미 기본합의문 = 페리 조정관은 클린턴 정부가 대외정책의 성공사례로 강조해온 94년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를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면서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처할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문제는 워싱턴 조야에서 북.미합의에 대한 평가가 급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최근 페리 조정관의 대북정책 재검토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사의 말을 인용, 기본합의는 '실패작품' 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제임스 릴리 전 주한대사도 "기본합의가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하는 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오던 클린턴 정부도 이제는 '부분적 성공' 을 거뒀다는 다소 소극적 해석으로 변하고 있다" 고 말한다.

이런 평가는 북한이 또다른 핵의혹시설 (금창리) 을 건설하고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본합의 도출에 참여했던 페리로서는 자가당착적인 이같은 평가를 수용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페리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전.현직 관리들과 정책연구기관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기본합의의 '정치적 내구성' 이 이미 상실됐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즉 '북한체제의 조기붕괴' 와 '시간은 우리편에 있다' 는 두가지 가정에 토대를 둔 기본합의 등 기존 대북정책이 현실과 괴리가 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 정부가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접근전략을 마련하지 못하고 북.미 기본합의를 단순히 재포장한 보고서로는 미 의회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얘기다.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벤 길먼 위원장의 자문관이며 북한을 두차례 방문했던 마크 커크는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의회의 신뢰가 실추됐다는 것이 문제" 라며 "페리 보고서가 단순히 현 정책을 그럴듯하게 홍보하려 해선 안되며, 대북해법의 장기적 전략을 담아야 한다" 고 지적했다.

◇ '포괄적 접근법' 에 공감대 확산 = 지난 1월 중순 USIP는 내부 모임을 갖고 현안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했고, 미 외교협회 (CFR) 도 서울포럼측과 워싱턴 및 뉴욕에서 회의를 갖고 대북 해법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처럼 다양한 창구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논의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보이고 있다.

우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응징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북측의 무력대응시 피해가 막심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로버트 매닝 CFR 선임연구원은 "서울 근방에 약 7만5천명의 미국인이 머무르고 있는 현실 때문에 북한의 군사보복을 촉발시킬 군사조치를 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고 인정한다.

대북 강경론자인 윌리엄 오덤 전 국가안보위원회 (NSA) 위원장마저 "미국이라 해서 당사국인 한국정부가 지지하지 않는 대북 무력응징을 취할 수는 없을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캔터 전 국무차관은 "미 정부는 북한이 핵 재처리를 시도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무력응징을 고려하게 될 것" 이라며 미 정부의 포기하지 못할 한계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번 대북해법은 94년 대북 핵협상 당시에 비해 더 포괄적인 대안을 마련하되 북측의 호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가혹한 무관심' 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도움말 주신분]

리처드 솔로몬 : 평화연구소장.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벤 길먼 :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

마이클 아마코스트 : 브루킹스 연구소장

에드윈 풀러 : 헤리티지 재단 소장

아널드 캔터 : 전 국무차관

리처드 아미티지 : 전 국방차관보

제임스 릴리 : 전 주한대사

윌리엄 오덤 : 전 국가안보위원회 (NSA) 위원장

마크 커크 :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전문위원

피터 브룩스 : 〃

로버트 매닝 : 외교협회 선임연구원

웬디 셔먼 : 국무장관 자문관

제임스 프리스텁 : 국방대학 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셀리그 해리슨 : 센트리 재단 선임연구원

리온 시걸 : 사회과학 연구협의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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