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순탄치 않을 ‘새 일본’의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지난주 며칠 일본 규슈를 다녀왔다. 중의원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지만 거리에서 본 것은 썰렁한 유세차와 선거에 참여하자는 현수막, 각 당 중진 정치인들의 지원유세 일정을 알리는 벽보 정도였을 뿐 한국에서 느꼈던 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울었다는 모든 여론조사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1955년부터 계속된 -93년의, 10개월간 야당 생활은 빼고- 자민당 집권에 종지부를 찍는 정치사적 의미를 감안한다면 적적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선거는 예상대로 민주당 압승, 자민당 참패로 끝났다. 드러난 수치로만 보면 그야말로 정치판의 지각변동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민주당이 ‘정권 교체’와 함께 선거 슬로건으로 내건 ‘새로운 일본’으로 나가는 실질적 계기가 될 수 있을까.

민주당이 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공약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경제정책의 중심축을 성장·수출·효율·대기업 중심에서 분배·내수·배려·서민과 중소기업으로 옮기고 이를 위해 재정의 역할을 보다 강화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평소 색채로 볼 때 당연한 노선이고 이번 선거판에서도 상당히 먹혀든 개념인 것은 분명하다. 실제 지난 7월의 완전실업률이 5.7%, 유효구인배율은 0.42로 각각 사상 최악의 수치를 기록하는 상황에서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강화는 당연하다. 하지만 올 회계연도 말 국가·지방의 장기채무잔고가 국내총생산(GDP)의 1.7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열악한 재정상태에서 이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민주당 성향의 아사히신문이 며칠 전 사설을 통해 소비세율 상향 조정에 대한 논의 유보 등 세원 확보에 대한 민주당의 소극적 태도에 대해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또 하나는 외교·안보의 중심축을 절대적 대미 의존에서 대등한 대미외교, 아시아 중시 외교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 또한 민주당의 기존 입장임에 틀림없지만 과연 집권 후에도 같은 소리를 낼 수 있느냐 하는 우려가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이미 일·미 동맹에 대한 일본인 주류의 강고한 믿음, 집권 후 최대 계파로 부상할 것이 분명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대표의 우파적 시각, 선거 기간 중 독자적 대미외교에 대한 목소리가 계속 잦아든 정황 등을 감안한다면 대미 의존 탈피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아시아 중시에 대한 구상도 마찬가지다. 차기 총리가 될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이나 ‘아시아 공통통화 창설’ 등 매우 적극적 주장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경제정책의 기조로 내건 민주당이 동아시아 공동체는 고사하고 이미 진행 중인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이라도 적극 나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국외자의 회의를 뛰어넘어, 일본의 새로운 선택이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박태욱 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