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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기술개발 위한 공격적 투자로 독자 비전 제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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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07면

“당신이 이미 이겼다.”
6월 26일 미국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사진) 독일 총리에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건넨 말이다. 9월 27일 독일 총선을 석 달이나 앞두고 나온 ‘승리 예언’이었다. 오바마는 당시 공동 기자회견에서 “메르켈 총리는 현명하고 실용적”이라며 “총리가 무엇이든 얘기할 때마다 그를 믿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4년째 세계 영향력 1위 여성, 메르켈의 리더십

‘철의 여인’ ‘독일판 마거릿 대처’라고 불리는 메르켈 총리가 국내외 무대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이 시대 최고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 세계 여성 정치인들은 그를 본받고 싶은 최고의 리더 모델로 떠올린다.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가장 윗자리에 올렸다. 4년 연속 1위를 고수한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도 그를 ‘200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했다. 그러면서 ‘패스브레이커(pathbreaker:새 길을 여는 사람)’라고 소개했다.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중도우파 기민당(CDU) 당수인 메르켈의 인기는 절정을 달리고 있다. ‘포르슝스그루페 발렌’의 여론조사(8월 21일)에 따르면 총리 선호도에서 메르켈은 64%로, 중도좌파 사민당(SPD)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3%)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지지를 얻었다. 메르켈의 인기를 업고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지지율은 사민당(23%)보다 훨씬 높은 37%나 된다.

메르켈의 리더십 비결은 무엇일까. 추진력과 단호함, 그리고 유연성으로 압축된다. 특히 글로벌 경제위기는 탁월한 위기 대응 능력을 각인시키는 기회가 됐다. 2005년 11월 총리에 취임한 메르켈은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강력한 개혁정책으로 통일병에 걸린 독일 경제를 유럽의 ‘환자’에서 ‘성장 엔진’으로 탈바꿈시켰다.

경제위기 초기만 해도 메르켈은 경기부양 대책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르켈식 해법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인위적인 경기부양보다 미래 기술 개발을 위한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등 독자적인 비전을 보여줬다. 슈테펜 캄페터 기민당 경제전문가는 “독일은 과시용 부양책을 거부했다”며 “메르켈이 독일을 올바른 길로 가게 했다”고 말했다.

그의 선택이 맞았음은 경제 성적표로 증명되고 있다. 2분기 경제성장률은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0.3%에 달했다. 3분기에도 0.8%에 이를 것이라고 독일경제연구소(DIW)는 전망했다. 이는 4년 임기의 총리직 재선을 노리는 메르켈에게 최대 호재가 되고 있다. 독일 총선이 실시되기 사흘 전인 9월 24일 미 피츠버그에서는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가 열린다. 이 자리에선 메르켈식 위기 대응에 대한 평가와 함께 다른 정상들의 찬사가 예상된다.

메르켈의 성공 신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단호함’이다. 타임지는 최근 카리스마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메르켈을 꼽았다. 과감한 행동으로 카리스마의 부족을 보완하는 스타일에 속한다는 설명을 달아서다. “푸근한 가정주부 이미지와 달리 권좌에 오르기까지 가차없이 정적을 제거해온 냉혹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아마 ‘정치적 대부’인 헬무트 콜 전 총리와의 결별을 의식한 비판일 것이다. 콜은 메르켈을 중앙 정치의 주역으로 견인했다. 독일이 통일된 1990년 콜 총리는 36세였던 무명 정치인을 일약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발탁했다. 남성이 지배하는 독일 정치 무대에서 여성으로, 가톨릭이 중심인 기민당에서 개신교 신자로 메르켈은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동독 출신에다 자녀도 없고 이혼 경력까지 있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오히려 강점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콜의 전폭적인 지원과 메르켈 특유의 성실함과 치밀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94년 총선에서 이겨 콜이 다섯 번째 내각을 꾸릴 때도 메르켈은 환경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99년 ‘콜의 정치적 양녀’는 한 칼에 ‘대부’와 연결된 탯줄을 끊고 만다. 98년 총선에서 패해 기민당수 자리에서 물러난 콜은 재임 중 불법 비자금 사건이 드러나 곤경에 빠졌다. 메르켈은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콜을 정면 압박했다. ‘콜이 묵인한 사건들이 기민당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면서 “이제 기민당은 콜과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메르켈은 ‘국민 불신을 해소한 용기 있는 정치인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결정적인 순간에 개인적 의리나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단호함을 보였던 메르켈은 이후 인기가 치솟아 결국 기민당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됐고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올랐다. 최근 메르켈은 선거 유세를 시작하면서 여전히 보수세력의 대(大)원로인 콜을 찾아가 화해를 청했다.

메르켈의 리더십은 국제무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때로는 탁월한 중재자로, 때로는 단호한 주도자로 협상테이블을 리드하면서 독일의 국가 위상을 높였다는 칭송을 듣고 있다. 총리에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메르켈은 유럽연합(EU) 예산안 협상을 타결시키는 조정 능력을 선보였다. 또 이라크전쟁으로 사이가 멀어졌던 미국과 독일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독일이 EU 의장국과 G8 의장국을 동시에 맡고 있던 2007년 메르켈은 외교적 역량을 또 한번 과시했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의 전기를 마련한 유럽헌법 ‘미니조약’ 합의를 주도한 것이다.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메르켈의 부드러움에 녹아들어 갔다’는 찬사를 보냈다. FT는 “배수진을 치고 나왔던 폴란드 정상을 압박하지 않고, 폴란드 총리와의 회담 때 리투아니아·프랑스 대통령을 두 번이나 초청해 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98년 두 번째 결혼을 한 메르켈은 가정에 돌아가면 쇼핑 목록을 만들고 음식을 만드는 ‘평범한 주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남편 요하임 자우어는 메르켈이 동독 과학아카데미 연구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료로 알고 지낸 사이다. 훔볼트대 화학과 교수인 자우어는 공식석상에 좀체 나타나지 않는다. 언론의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고 자신과 가정사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문다. 그에게 ‘오페라의 유령’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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