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에 묻는다]12.결국은 휴머니즘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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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세기말은 과연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는가. 서운하지만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가 남긴 교훈이다. 인류가 세기 단위의 사고를 가진 이래 이미 몇 번째의 세기말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역사적 전환점이 된 적은 없다.

그러한 기대는 다만 흘러가는 강물 위에 깃발을 꽂는 부질없음이다. 강물은 어제의 몸짓으로 내일의 물길을 계속할 따름이다. 그러나 세기의 전환기가 갖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반성과 그 반성들의 결집이다. 그러한 결집이 이루어내는 동력이다.

반성이란 지금까지 사용해 온 개념과 담론의 틀을 바꾸어 '역사적 현재' 를 새롭게 범주화하는 일이다. 자본과 노동, 종교와 여성, 보수와 진보, 선과 악,가상과 실제, 남성과 여성 등 20세기가 몰두해 온 수많은 담론들은 한편으로는 개별 담론들의 자폐성 (自閉性) 과 분석적이고 전형적인 방법론의 한계로 말미암아, 또 한편으로는 이항대립적인 상대주의와 협소한 계급적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급기야는 본말이 전도되고 대상 자체가 실종되었다.

자본은 더 이상 생산요소가 아니며 노동은 더 이상 인간적 영역이 아니다.

종교는 세속화하고 이성은 교조화했으며 보수가 개혁이 전위가 되고 진보는 완고한 보수로 남았다.

선악 (善惡) 의 구분은 물론 가상과 현실마저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20세기를 가득 채웠던 수많은 승리와 좌절, 환희와 비탄을 돌이켜보면 승리를 기리고 패배를 모멸하는 숱한 담론 속에서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삶 그 자체다.

인간논리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다기망양 (多岐亡羊) 의 형국이어서 이들 논의는 그가 복무해야 할 대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최후의 근본적 성찰로서의 휴머니즘이 요청되는 역사적 조건이 되고 있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사회적 정신적 삶이 그때마다 놓여있는 구체적 조건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는 것' 이다. 이를테면 수시 (隨時) 와 처중 (處中) 을 성찰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에서부터 부르주아 휴머니즘, 사회주의 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휴머니즘의 역사는 그때마다 놓여있는 역사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해왔다.

그러나 휴머니즘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상이한 내용을 갖는 휴머니즘이 '역사적 현재' 가 포괄하고 있는 상이한 시간대의 복잡한 교직 (交織) 속에서 계속해서 휴머니즘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휴머니즘은 때로는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류사의 모든 지적 논의가 언제나 휴머니즘끼리의 대결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유이며 동시에 휴머니즘 그 자체가 격하되고 폐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휴머니즘의 역사적 과제는 한마디로 '죽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시체를 스스로 묻도록 하는 일' 이었으며, 그 장송 (葬送) 의 자리에서 새로운 내용을 채우는 일이었다.

휴머니즘의 역사는 일찍이 인간의 의지를 신화 (神話)에 의탁하여 관철하려 했던 고대 휴머니즘에서부터 혹은 사회체제의 변혁을 통하여, 혹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혹은 물질적 풍요를 통하여 인간과 인간의 존재조건을 확장하려는 실천적 과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1백년의 역사에서, 그리고 1천년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다. 그 교훈이란 인간은 줄곧 스스로 만든 것과 싸우는 역설적인 역사를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제국 (帝國) 이었건 신 (神) 이었건 거대한 축적자본이었건 시장 (市場) 이었건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었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만들어낸 것으로부터 배반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휴머니즘 역시 휴머니즘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의 관리에서 실패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휴머니즘은 실천적 과제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과 동시에 그 과정을 인간적인 것으로 길들이는 모성 (母性)에 충실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언제나 기존의 휴머니즘을 부단히 넘어서는 대안 담론으로서 역사 현장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휴머니즘은 역사적 현재성을 띠는 최후의 사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재성은 당대의 기본적인 모순구조를 드러내는 일에 충실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모순구조와 인간을 대면하게 되는 일이 곧 휴머니즘의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서 휴머니즘의 내용을 새롭게 구성하는 작업이다. 1999년의 역사적 조건이란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와 동학 (動學) 이다.

자본주의 2백년사가 만들어낸 거대한 실체로서의 자본 축적구조와 자본논리다. 자본논리는 광범한 네트워크를 광속으로 이동하면서 그 외연을 세계화할 뿐 아니라 정치권력.과학기술.문화.가치.종교 심지어는 인간의 심성까지 내포화함으로써 자본의 축적과정을 완성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창의는 물론, 일체의 가치를 자본논리에 예속시킴으로써 인간을 상품화하고 인간관계를 시장화한다. 20세기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으로 규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자기 운동에 기초한 대안 패러다임이기보다는 반운동 (anti - movement)에 기초한 저항 패러다임이었으며 결국 사회주의의 실패는 바로 인간주의의 실패로 평가되기도 한다.

21세기는 결국 자본논리와 인간논리를 맞서게 하는 휴머니즘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가장 기본적 준거로서의 휴머니즘이 새로운 세기의 목전에서 다시 돌아가야 할 근본적 반성의 자리라는 사실에 재론의 여지는 없다.

그리고 '세계의 시장화' 와 이에 맞서는 '투쟁의 세계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라는 실천적 과제에 비추어 볼 때 21세기는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최초로 '임무와 주체' 가 동시에 결합하는 진정한 휴머니즘의 세기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결국 휴머니즘인가' 라는 물음은 역사의 격변기에서 그때마다 제기했던 최후의 질문이면서 동시에 근본적인 질문이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 던져야할 질문은 전망의 구조화와 정신적 식민화라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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