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륜 발언' 파장…상명하복 조직에 충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대전 이종기 (李宗基) 변호사 수임 비리 사건 수사는 결국 검찰에 핵폭탄으로 되돌아왔다.

심재륜 (沈在淪) 대구고검장이 직속 상관인 검찰총장과 이원성 (李源性) 대검차장을 직접 거명하며 사퇴를 촉구했기 때문이다.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여기는 검찰 조직 내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검찰 역사상 처음이다.

게다가 沈고검장은 "검찰 수뇌부가 사퇴하지 않는 한 먼저 사표를 내지는 않겠다" 고 공언했다.

비리에 연루됐으니 사표를 내라는 수뇌부의 요구에 대한 노골적인 항명이다.

일사불란을 자랑하던 검찰 조직을 뿌리째 흔드는 사태다.

그가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는 더욱 충격적이다.

沈고검장은 "검찰은 과거 수많은 시국.공안사건과 정치인 사건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인권을 탄압했다" 고 검찰의 과거사에 직격탄을 던졌다.

학생 운동권.재야에서나 나올법한 말들이 고검장의 입에서 그대로 터져나온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인사때면 정치권에 줄을 대고 누구는 누구 인맥이라는 등의 말이 횡행한다" "이번 사건 수사에 총장 인사를 앞둔 음모설이 나돈다" 며 검찰의 치부도 다 폭로해 버렸다.

이에 대해 검찰 수뇌부는 즉각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李대검차장은 "고검장까지 지낸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며 沈고검장의 혐의부분을 언급했다.

"李변호사로부터 돈도 받고 향응도 많이 받았는데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조직 전체를 파괴하고 있다" 는 것이다.

검찰 수뇌부는 최근 김태정 (金泰政) 총장이 "대전 사건 관련자 대부분으로부터 사표를 받겠다" 고 밝힌 뒤 검찰 내부의 동요가 발생했고,沈고검장의 반발엔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폭탄선언으로 우선 조직 내부에서 심각한 분열 양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가뜩이나 일선에선 "이런 식으로 수사하다가는 검사들이 다 죽는다" 는 불만이 팽배하던 중이었다.

따라서 "검찰 조직이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는 현 수뇌부 지지와 "우리만 책임지란 말이냐" 는 반대파가 갈리고 이런 분위기가 표면화할 가능성도 크다.

게다가 沈고검장에 이어 또다른 검사장급 고위간부가 덩달아 반발할 경우 검찰은 수뇌부의 진퇴문제 등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태는 판사들의 움직임과 사법부 수뇌부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판사들은 대전사건 이후 언론의 보도태도 등에 대해 강한 반발을 보여왔다.

이 분위기가 사법부 고위층 책임론 등으로 번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이 사태는 청와대를 비롯한 여야 모두를 이 사건의 폭풍 속으로 끌어들일 것으로 보여 정치권의 공방전으로도 번질 전망이다.

폭탄발언으로 검찰은 만신창이가 되는 게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검찰이 정권의 시녀라는 구태를 벗고 '국민의 검찰' 로 다시 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시민단체 등의 지적도 있다.

김종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