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창훈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⑪ 라(螺·고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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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바닷가에 가면 고둥이 지천이다. 고둥맛은 씹는 맛이다.

소녀는 가장 큰 고둥 껍데기를 들어내 입에 대 주었다. 난 그물 걷고 온 어부처럼 술을 마셨다. 처음으로 소꿉놀이를 해본 게 그때였다. 짧은 순간 나의 아내였던 그 소녀. 실제 결혼은 어떻게 했으며 어떤 갱년기 장애를 앓고 있을까.

종류가 워낙 많아 원문 인용을 피했다. 고둥은 둥글게 말려 있는 껍데기를 가진 연체동물이다. 라(螺)는 소라인데 고둥의 종류에 포함된다.

고둥에 관한 나의 첫 기억은 어떤 소녀다. 초등학교 가기 직전이었다. 무슨 일인가로 외가 큰댁에 갔다. 어른들은 모두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내 또래는 없었다. 심심하게 왔다갔다하던 나는 아랫집 마당에서 혼자 앉아 있는 소녀를 보았다. 힐끔힐끔, 돌아서지도 다가가지도 않고 그렇게 서 있을 때 그 아이가 말했다.

“우리 곡석(소꿉놀이) 할래?”

나는 엉거주춤 다가갔다. 처음으로 소꿉놀이를 해본 게 그때였다. 나는 남편이, 그 아이는 아내가 되었다. 소녀는 여러 가지 고둥 껍데기를 가지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대문 밖을 나갔다가 들어오자 그 아이는 고둥 껍데기와 동백나무 이파리와 질경이 찧은 것으로 밥상을 차려 놓았다. 나는 배고픈 어른들이 그러하듯 과한 동작과 소리를 내며 먹는 시늉을 했다.

“뱃일하고 왔으니 술도 마셔야지.”

소녀는 가장 큰 껍데기를 들어내 입에 대주었다. 나는 그물 걷고 온 어부처럼 술을 마셨다.

“맛이 어때?”

“좋아. 너무 맛있어.”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햇살이 머리카락 아래에서 환하게 부서졌다. 머리핀도 반짝거렸다. 나는 소녀가 좋아졌다.

“이제는 잘 시간이야.”

우리는 상을 한쪽으로 치우고 덕석 위에 누웠다. 그 아이가 말했다.

“부부끼리는 손잡고 자는 거야.”

작고 가녀린 손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나는 가슴이 떨렸다. 눈감고 있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뱃일을 하러 나가야 했지만 그 순간이 며칠 전 맞은 주삿바늘처럼 깊게 박혔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구나…. 하지만 우리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아이 엄마가 부르며 무언가를 시켰기 때문이다. 소녀도 아쉬운 얼굴로 살림살이를 접었다. 잘 가, 아이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헤어지기 싫었던 나는 말했다.

“내일 올게. 우리 내일 또 하자.”

소녀가 답했다.

“우리 집 내일 아침에 부산으로 이사 가.”

어른들은 윷놀이를 할 때 고둥 껍데기를 말로 썼다. 윷놀이 말은 제 동네에서 가장 흔한 것으로 한다. 이를테면 벌교에서는 꼬막 껍데기를 쓴다. 나는 어른들이 “걸이야, 모야” 하면서 말을 옮길 때마다 소녀가 생각났다. 고둥 껍데기를 가지고 갔을 텐데, 그렇다면 어디에서 누구와 소꿉놀이를 할까, 생각했다.

고둥 껍데기는 섬마을 예술활동의 재료로도 쓰였다. 친구 오빠는 병을 오래 앓았다. 언젠가 그의 방을 방문했을 때 그는 색색의 고둥을 나무판에 본드로 붙이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하트나 배, 우리나라 지도 같은 건 이미 완성되어 벽에 붙어 있었다. 그는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언제 만들었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말했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나 자신의 쓸쓸함에 대한 설명으로 들렸다.

바닷가에 가면 고둥은 지천이다. 그 때문에 잡아먹기 가장 만만하다. 맛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먹을 수는 있다. 사리 때 물이 나면 많이들 잡으러 간다. 현지 주민이 갯것을 하고 있으면 무엇을 주로 잡는지 물어본다. 위가 편편하고 몸집이 큰 것을 시리고둥이라 하여 으뜸으로 친다. 잡았으면 해감을 시킨다. 바닷물 담은 그릇에 넣어두면 된다. 모래밭 주변 갯바위에서 잡았다면 모래를 머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 번씩 흔들며 해감을 오래 시킨다. 샘플로 몇 개 삶아보아 모래가 씹히는지를 확인하는 게 좋다.

삶았으면 까먹을 차례. 고둥을 깔 때는 핀을 찔러 넣은 손은 그냥 두고 고둥을 돌려야 쉽게 빠진다(몇 개 돌려보고 머리 부분이 계속 떨어져 나오면 덜 익었다는 소리다). 통째로 빠졌다면 아주 정교한 동그라미를 보게 될 것이다. 꼬리 부분에 노란 살이 있으면 그게 생식소이다. 기름기가 많아 변비 중인 사람에게 좋다. 반대로 배탈 중인 사람은 피한다.

울퉁불퉁한 것은 다시리 고둥인데 쓴맛을 낸다. 물론 이 쓴맛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머리 아래, 치마처럼 얇은 막이 살을 약간 덮고 있는 게 보일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쓰다. 싫으면 이것을 떼어내고 먹는다. 그냥 먹기도 하고 간장 양념을 하여 반찬으로 먹기도 한다. 섬에서는 전분을 풀어 탕을 하기도 한다. 게고둥도 있다. 빈 껍데기에 들어가 살고 있는 녀석이다. 키워 보겠다고 가져가기도 하는데 금방 죽는다. 이 녀석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 다리를 끊는 습성이 있다. 큰 것은 돌돔 미끼로도 쓰인다.

그런데 짧은 순간 나의 아내였던 그 소녀는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실제 결혼은 어떻게 했으며 어떤 갱년기 장애를 앓고 있을까.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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