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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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7장 노래와 덫

한철규 먼저 바지를 털며 일어섰다.

손수레 좌판은 마침 곁에 있던 과일상인에게 부탁한 다음 헤적헤적 장마당 속으로 들어섰다.

박봉환이도 뒤따라 나섰다.

곡물전과 철물난전 사이에 휘장을 둘러친 장국밥집이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좌석은, 선짓국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을 목로에 얹어 둔 촌로들이 나누는 대화도 없이 남생이들처럼 둘러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응달진 구석자리에 역시 나란히 앉았다.

국물보다는 건데기가 많아 그릇 가녁이 수북한 선짓국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이 목로에 놓아지기까지 두 사람은 앙숙인 듯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제각기 소주잔을 채워 들이켰다.

그날의 매상 따위는 안중에 없어져 버린 철규가 자작 (自酌) 으로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켰다.

식도에 털어넣듯 성급하게 마셔 대는 철규를 비로소 힐끗하던 봉환이가 이죽거렸다.

"담력만 이골이 난 게 아니고 주량도 억시게 늘었는가 보네요. " "주문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는 얘기는 변선배로부터 들었지만, 남도 산골인 여기서 또 우리들끼리 마주칠 줄은 몰랐구만, 그동안 우리 서로 살벌한 장마당을 말똥처럼 뒹굴면서 살아왔지만, 손가락 하나 다친데 없이 견뎌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눈시울이 뜨겁구만. 내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드나?"

"그만한 일 가지고 눈시울 억시기 뜨겁게 낳시더. 내보고 물어 볼 것 없어요. 당사자가 생각해 보면, 개구리가 용됐다 카는 것을 알아챌낀데요?" "비꼬지 말어. 우리들이 서로 등돌리고 살게 된 까닭을 나라고 모를 리 없지만, 윤종갑의 감언이설에 동업을 선뜻 결정해 버린 것은 봉환이가 경솔했다는 생각도 들어…. " 그때였다.

박봉환은 냉큼 손을 들어 철규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런 케케묵은 옛날 이바구 할라끄먼 우리 그만 일어섭시더. 한 살 터울 사이에도 세대차가 나서 대화가 안된다 카는 세상인데, 일년 전 얘기를 새삼스럽게 꺼내서 쓸개를 뒤집을라카는 꿍심이 나변에 있어요? 엎어진 놈한테 뒷덜미 잡아 눌리려는 삼뽀라요?"

"봉환이… . 우리 서로가 외로운 처지들이 아닌가?" "나는 외로울 새가 없는 사람이라요. 목구멍으로 거미가 기어들까 싶어서 밤잠까지 설치면서 동분서주하는 처진데, 고독이고 깨묵디고 있겠어요? 햇볕에 끄슬린 내 피부 한번 보소. 이게 거북이 등떠리지 사람의 피부라 할 수 있겠니껴? 정신없이 살고 있는 사람한테 태평스럽게 외롭다는 고상한 소리를 쑤셔박는다 캐도 귀에 들리지 않아요. "

"목청도 우렁차고 외로울 것도 없다는 걸 보니까, 한밑천 두둑하게 건진 게로구만?" "왜요? 대한민국에서 우리락꼬 한밑천 못 건진다는 요상시런 법이 있답디까? 어림없는 소리제. 도둑질하고 기집질 빼놓고는 잔데마린데를 가리지 않는다는 게 내 못또라요. "

"여기까지 뒤따라온 것은 한밑천 잡았다는 얘기 하고 싶어 안달나서였구만. 그러나 나는 가슴 뿌듯해. 종자돈을 불리기까지는 봉환이가 고초를 도맡아 치러낸 까닭이었겠지. 한동안은 우리를 겨냥해서 해코지할 궁리도 했었는데, 봉환이가 미련한 짓거리로 생각해서 단념시킨 게 아니냐는 짐작도 하고 있었어. 그걸 보면, 봉환이도 보기 드물게 무던한 사람이야. 지탄을 받아야 한다면 이렇게 오지랖 넓은 채 말하고 있는 바로 나지.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묻어 버리고 행상꾼으로 열중하는 봉환을 만나고 보니 가슴이 찡했었어. 말하는 것을 듣자니 우리가 옛날처럼 다시 뭉쳐서 뒹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봉환이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거나 딱지 덜 떨어진 위인으로 생각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 그걸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

맞은편 촌로들이 둘러앉은 목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주잔만 들이켜고 있던 봉환은 코대답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수레 좌판을 둔 초등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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