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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나치 청산” 외치던 카뮈, 동료 문인 살리려 탄원서 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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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프랑스의 대표적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지식인이었던 로베르 브라지약.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해방되자 프랑스는 나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의 이념에 동조하고 대독 협력에 앞장선 인사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모든 분야를 망라한 숙청 작업에서 특히 여론의 관심을 끈 것은 언론인과 문인이었다. 나치 강점기에 친독 성향 신문·잡지에 기고한 언론인, 나치와 비시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한 문인들이 표적이었다.

부역 지식인의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계는 치열한 논쟁으로 끓어올랐다. 작가인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청산론’ 간 격돌이 대표적이었다. 모리아크는 청산론이 프랑스 국민을 ‘저항운동가’와 ‘부역자’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 정치적 차원을 벗어난 기독교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했다. 반면 카뮈는 “청산 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청산론의 중심에 섰다. 당연히 카뮈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언론인과 문인이 맨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은 재판부의 의도적 전략이기도 했다. 이 범주의 부역자들은 가장 잘 알려져 있었고, 부역행위의 증거가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시 정부 주역들이 이미 국외로 도망쳐버려 당장 이들을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잘 알려진 협력자들부터 처벌하면 숙청 지연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글은 확실한 물증으로 남아 있어서 신속하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파리의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 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무려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중 7명이 처형되었다. 처형된 7명 중 가장 큰 논란이 된 인물은 로베르 브라지약(1909~1945)이었다. 1945년 1월 19일 재판 받을 당시 브라지약은 36세로, 프랑스의 대표적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지식인이었다. 이 젊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아까워한 문화계 인사들은 사면 탄원서를 드골 장군에게 보냈다. 탄원 서명자 59명 중에는 ‘철저한 정의’를 외쳤던 카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거부되고 결국 2월 6일 브라지약은 총살되었다.

“왜 돈으로 부역한 기업가들보다 말과 글로 부역한 자들이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작가 베르코르는 단호하게 답했다. “기업가를 작가와 비교하는 것은 카인을 악마와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카인의 죄악은 아벨로 그치지만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