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본받을만한 관용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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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엘리자베스 도울 미 적십자사 총재가 사직하고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공화당 정부에서 두번이나 장관을 지내고 8년 전 적십자사 총재로 임명된 도울 여사는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간 뒤에도 자리를 지켰다.

지난 대선 당시 총재직을 휴직하고 공화당 후보였던 남편 밥 도울을 도와 96년 전당대회에서 대표연설을 맡기도 했다.

결국 도울은 패배했지만 정적 (政敵) 과 동침하는 부인에 대한 '우리식' 보복은 없었다.

급기야 2000년 대선을 앞두고 집권당에 도전하는 공화당 후보로 정계에 복귀하는 도울 여사의 행보는 민주당측으로 볼 때 범새끼 키운 격이 됐다.

지난 한해 미국 내외에 유난히 큰 재해가 많아 적십자사 총재의 역할이 부각됐고 정치권에선 도울 여사의 정계 투신을 끊임없이 점쳐왔음에도 그랬다.

어두운 정치판 소식으로 우울하게 시작된 새해 벽두 때마침 터져나온 도울 여사의 사임소식은 관용 (寬容) 의 정치를 생각하게 한다.

대선 당시 불법행위가 있었다면 그 패착 (敗着) 을 문제삼아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끝없는 정치투쟁으로 번지는 정계의 난맥상은 법과 정치영역의 혼돈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우리 정치수준에서 법과 정치의 엄격한 구분을 요구하는 것은 애초 무리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 집권경험을 통해 알만한 이들이 되풀이하는 구태의연한 행동이나 야권을 향한 힘있는 이들의 인색함 모두 국민을 실망시킨다.

법 테두리 안에서의 투쟁이 선진사회의 예측가능한 정치를 보장한다면 관용을 즐길 줄 아는 여유는 정치의 묘미 (妙味) 를 더해준다.

도울 여사의 경우처럼 미래의 범새끼를 용납할 아량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전하는 국민 심기를 살피는 관용의 정치를 흉내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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