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또 다른 위대함, 시스템 인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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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35면

1997년 뉴욕 타임스는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의 첫 자리에 칭기즈칸을 세웠다. 참담하기 짝이 없는 불행한 가족사와 부족의 고난을 뜨거운 열정으로 극복한 인간적 위대함, 유목민족 특유의 기마군(騎馬軍)으로 짧은 기간에 중국에서 유럽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점,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동서 문명을 연결시킨 점, 역참제(驛站制)를 채택해 오늘날의 인터넷과 같은 초고속 통신기능을 통치와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한 점이 선정의 이유다.

이러한 승리의 역사 속에는 칭기즈칸의 인사정책이 함께한다. 원래의 몽골족은 물론이려니와 점령지마다 사람을 풀어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모아 ‘인재 DB’를 만들었다. 출신 부족을 가리지 않고 어떤 역량을 가졌는가, 얼마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가를 잣대로 사람을 모은 것이다. 적소적재(適所適材) 인사의 대표적 사례가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발탁이다. 망한 나라 거란의 황족 출신으로 깊은 산속 절간에 숨은 인재를 찾아낸 것이다. 야율초재의 지휘 아래 유목민 집단은 중앙집권제를 정착시키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며 농업 발전과 조세제도 확립 등 나라의 모양을 갖춰 나가면서 세계적인 제국으로 비약했다.

칭기즈칸은 영웅다운 포용(包容) 인사를 했다. 비록 적이었을망정 세계 정복의 꿈을 함께할 사람이라면 중용했다. 자신에게 활을 쏘아 치명상을 입혔던 타이치우드족의 장수 제베(고려인으로 추정), 무칼리, 젤메를 설득해 부하로 삼고 유럽 정복이란 빛나는 공을 세우게 했다. 또 중용된 이들에게 전권을 위임해 마음껏 일하도록 만드는 통합과 자율의 인사 운용을 했다.

남북전쟁과 노예제 찬반 다툼으로 사분오열 만신창이가 된 미국이 통합을 이루어낸 밑바탕에도 링컨 대통령의 포용 인사가 있었다. 정규 학교도 못 다니고 독학으로 겨우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링컨은 이름 높은 스탠턴 변호사와 사건을 공동 수임케 되었다. 링컨은 뛰어난 업무 처리 방식과 증거·증인의 채택, 유창한 변론 등 스탠턴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과 역량을 공유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키만 전봇대처럼 껑충한 시골뜨기라고 시도 때도 없이 무시당하는 수모를 견뎌야만 했다. 심지어 대통령 당선 뒤에도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혹평했다.

주변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링컨은 “나는 수백 번 무시당해도 좋아요. 다만 그 사람이 국방장관이 돼 우리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임무 수행을 잘하기만 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소? 더욱이 국정을 잘 수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오”라며 정적 스탠턴을 임명했다. 150여 년 뒤, 오바마 대통령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 적소적재와 포용 인사정책으로 ‘변화된 미국’ ‘새로운 미국’을 설계 중이다.

우리에게도 포용과 시스템 인사를 시행한 군주가 있다.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의 인사정책은 어떠했는가? 군주 개인의 기호나 변덕에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 인사를 채택했다. 개국 초기의 어수선함과 공신들의 무분별한 인사 개입에 대응하기 위해 승진·전보의 기준으로 순자법(循資法)을, 보직 기준으로 행수법(行守法)을 만들었다. 훗날 시스템 인사는 중종대에 인사전담기구 이조전랑제(吏曹銓郞制)로 발전한다. 또 정5품으로 품계는 낮지만 핵심 요직인 이조정랑(吏曹正郞)이 작성한 인사안을 문무 중신들이 회람하며 찬반 표시를 하게 하고 그 의견에 따라 인사를 결정하는 시스템이 고려시대에 맹아가 싹튼 도당록(都堂錄)이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해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양성했다. 적소적재 인사의 파격적 사례가 노비 장영실의 과학 분야 발탁이었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을 살지게 할 인재를 조야를 초월해 발굴하는 현량과를 중종 때부터 실시한 것도 이런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라 안팎의 상황이 어지럽기 짝이 없다. 난국을 헤쳐 나갈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은 정부는 무엇보다 앞서 포용과 시스템 인사를 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이 편안하고 국가가 발전한다. 지난 1년 반 동안 드러난 논공행상 인사, 네 편 쫓아내고 내 편 챙기기 인사, 여러 공직 후보자의 법률적·도덕적 결함 등에 국민은 크게 실망하고 있다. 이를 벗어나려면 역대 정부가 여와 야, 민과 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리해 중앙인사위에서 업데이트를 하고 있는 인재 DB를 적극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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