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건전한 경쟁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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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소련이 해체되기 몇년 전 소련인 학자들이 일본을 방문, 시찰한 적이 있다.

이들은 일본사회를 두루 살피고 나서 "일본이야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사회주의 국가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자본주의 경제대국 일본은 어떤 의미에선 사회주의 국가라 할 수 있다.

일본주식회사라는 말이 있을 만큼 국가는 주요 경제정책을 계획.시행하는 역할을 맡고, 사회는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수많은 통제의 끈으로 얽혀 있다.

근면하고 성실한 국민은 직장과 가정을 헌신적으로 지키며, 법규를 잘 준수한다.

일본은경제적 평등이 가장 잘 실현된 나라다.

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평등한가를 알 수 있는 지표 (指標) 로 소득 5단계 비교란 것이 있다.

소득이 가장 많은 5분의1과 가장 적은 5분의1을 비교, 소득격차가 몇 배인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일본은 2.9배에 불과하다.

옛서독 6배, 미국 9.4배, 그 밖의 대부분 나라들은 10배 이상이다.

평등사회 일본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연공서열 (年功序列) 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함께 기업에 입사하면 큰 잘못이 없는 한 20년 후 모두가 부장이다.

연공서열은 종신고용제.기업별 노조와 함께 전후 (戰後)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을 가져온 '3종 (種) 의 신기 (神器)' 로 소위 '일본 시스템' 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90년대 초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 시스템은 위기에 처했다.

91년 이후 11만개 기업이 도산했으며, 완전고용에 가까웠던 실업률은 사상 최악인 4.4%를 기록하고 있다.

관료주의와 정경유착 (政經癒着) 의 부패구조, 경직된 행정조직,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지연, 글로벌 스탠더드 (세계기준) 외면이 위기를 몰고온 주요 요인들이다.

일본총리 직속 민간자문기관인 경제전략회의는 최근 발표한 '일본경제 재생전략' 이란 보고서를 통해 평등과 공평을 중시하는 일본 시스템을 효율과 공정을 중심에 두는 '건전한 경쟁사회' 로 바꾸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쌍둥이적자와 기업경쟁력 저하로 신음하던 미국이 '뉴 이코노미' 이론에 따라 대대적 구조조정을 겪은 다음 90년대 들어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음을 실례로 들었다.

우리는 지금 범지구적 무한경쟁시대를 살고 있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국가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변신 (變身) 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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