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동아시아 협력 문화교류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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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얼마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날아온 뉴스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비전그룹' 제안 소식이다.

이와 아울러 호치민 (胡志明) 묘소 참배와 공산당 당사를 방문해 과거 한국의 월남전 참전을 사과하고 북한 개방에 베트남 공산당이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지난 9월 11일부터 두달간 열렸던 98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기간중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학자 가운데 베트남인 빈 신 교수가 있었다.

그는 현재 캐나다 국적을 가진 앨버타대 역사학 교수다.

그가 이번에 발표한 논문은 '한국과 월남간의 상호교류에 대한 고찰' 이었다.

그는 44년생으로 60년대말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하다가 월남전 반대데모를 해 일본 정부의 국외추방 명령을 받았던 이력이 있다.

캐나다의 토론토 글로벌 신문사의 도쿄특파원이 구명운동을 펼쳐 캐나다 정부가 그의 망명을 허락했다.

나는 어릴 적 할아버지가 즐겨 읽으시던 '월남망국사' 를 익히 알기에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과 베트남 사람들은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만큼 서양 제국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제물로 많은 피를 흘린 백성이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제국주의 식민지의 고통,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족상잔, 그것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

이제 새 시대가 다가왔다.

두나라 모두 제 나라를 찾았고,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제국주의도 옛날같이 존재하지 않는다.

양국이 협력해 새 시대를 열 동반자 관계가 무르익을 때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형식으로 동반자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는 좀 더 깊은 생각을 가미해야 한다.

동아시아 비전그룹 9+3만 해도 마찬가지 문제가 개입된다.

미국.유럽이 주도한 지금까지의 세계질서에 동아시아가 21세기에 맡아야 할 과제는 세계 만방의 사해동포와 함께 또 다른 새 질서를 주도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제안에는 한국의 식자 (識者) 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서양 중심의 세계질서는 지난 5백년간 물질적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경제적 차원의 세계질서였다.

이제 그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열 문 앞에 와 있는 것이다.

경제질서가 새로운 비전을 요구한다는 것은 경제질서가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경제질서에 문화적 전통을 가미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는 이미지의 문제다.

경제적 상품은 그것을 만든 국가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찍이 동아시아는 한자문화권으로 말로는 서로 통하지 않더라도 필담 (筆談) 으로 상호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경협 비전에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다음으로 옛날 동아시아 세계질서에서 외교담당 주무부서는 예조 (禮曹 : 오늘날 교육부) 였다는 점이다.

통상은 문화교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IMF위기는 세계경제질서에 참가하면서, 배워야 할 상거래상의 문화적 질서를 소홀히 한 데서 파생된 것이다.

상거래의 투명성, 신뢰할 수 있는 거래장부, 정직성 등은 세계질서 참가자의 기본소양이다.

그것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옛날 우리 조상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기본예절마저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경협 '비전그룹' 제안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지역경제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 할 때, 문화적 차원의 배려와 협력 문제는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강신표 인제대 문화인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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