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그는 흥사단운동을 전개하라는 안창호의 지령에 따라 이 땅에 돌아왔다. 1922년에 펴낸 『민족개조론』도 그의 붓으로 쓰인 안창호의 저작이었다. 안창호가 서거한 1938년 이후 그는 ‘민족을 위한 친일’을 설파하는 논객을 자임했다. “징용에서는 생산기술을 배우고 징병에서는 군사 훈련을 배울 것이다. 산업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은 동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민족의 실력은 커질 것”이라 하여, 조선인이 제국의 성장에 공헌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라 확신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그대들이 피를 흘린 뒤에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거든, 내가 내 피를 흘려 싸우마”라며, 조선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동참하라고 호소했다. 사진은 그 시절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신문을 받으며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은 확신범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게 잡혀 다녔고, 대한민국에서는 반민법으로 잡혔고, 공산당은 반동이라고 잡아갔다.” 딸 이정화의 하소연이 잘 말해 주듯이, 그는 민족을 앞세우는 쪽의 눈에는 ‘반민족적 친일파’로, 민중을 중시하는 쪽의 눈에는 ‘반민중적 부르주아’로 비칠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 공산주의자의 74%가 전향할 만큼 어느 누구도 파시즘이 지배하던 시대의 광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민족이나 민중의 이름으로 그를 단죄하기보다 ‘민족을 위한 친일’의 논리구조를 낱낱이 파헤치고, 아직도 우리 안에서 숨 쉬는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사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