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빅딜과 한국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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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번주초에 발표된 5대그룹 구조조정안은 국내외로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시장경제를 신봉해 온 선진국에서도 정부와 대기업간의 마찰은 심심찮게 있어 왔지만 정부의 대기업 길들이기는 장사가 잘 되고 있을 때 했지, 이번 우리나라처럼 경제가 사상초유의 극심한 불황에 빠지고 대기업들 스스로가 적자에 허덕일 때는 엄두를 내지 않았다.

독점기업으로 돈을 긁어모으던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미국 정부가 해체한 것은 1차대전 이전의 경기호황 때였고, PC 컴퓨터가 출현하기전 메인프레임 컴퓨터업계를 석권하고 있던 IBM을 반 (反) 경쟁방지법으로 다스리려고 수년간 노력하던 미국 정부는 PC 컴퓨터의 등장으로 시장이 다원화해지자 이를 중도포기해 버렸다.

윈도와 사무용 소프트웨어로 요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회사가 미 법무부의 고소로 지금 법정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최근 발표된 아메리칸 온라인 (AOL) 사와 넷스케이프사의 합병 발표로 과연 지금의 법정투쟁을 계속해야 할지 미 정부는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 5대재벌 길들이기의 호기는 지금같은 경제불황기가 아니라 국제통화기금 (IMF) 위기 이전인 80년대와 90년대 중반이었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아도 극심한 자금압박과 국내외 시장의 침체로 경영상태가 극도로 열악할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외자본을 끌어들이고, 알짜 기업을 팔아치워서라도 부채비율을 줄이고 계열사간의 상호지급보증을 없애라고 정부가 압력을 행사하면 결국 외국 투자가들이나 해외 자본가들만 어부지리 (漁父之利) 를 보게 된다.

당장은 '재벌과의 전쟁' 에서 현정부가 판정승을 한 것 같지만 국가적인 손실은 엄청날 것이요, 외국 자본가들의 우리 알짜기업들의 주인행세로 갑자기 제 정신을 차린 국민들은 그제야 분노해 다음 정부때는 국내기업들을 헐값에 해외에 팔아넘긴 책임을 묻자고 제2의 경제청문회를 열라는 여론이 비등할는지도 모른다.

클린턴 행정부와 미국 의회가 우리나라의 재벌개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워싱턴의 막강한 SASS (반도체.자동차.철강.조선업) 로비그룹의 한국 경쟁사 죽이기 정책의 일환임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SASS의 압력이 없었으면 지난 10월 미국 의회가 1백80억달러 IMF 자금지원 조건으로 유독 한국 대기업만을 꼬집어 IMF 자금이 그곳으로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실로 치욕적인 단서까지 붙인 희극을 연출했을까.

정부는 IMF 위기라는 지금의 비상 경제시국에서 물리적인 대기업 구조개혁을 시도하지 말고 지금까지 재벌의 과도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가능케 했던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을 먼저 청산하고 진정한 시장경제 체제하에서의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이 정착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여건조성에 힘써야 한다.

기업의 참다운 구조조정은 성급하게 서두를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시장원리에 따라 해야 한다.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끝마친 두산그룹도 3년이 걸렸고, 미국의 크라이슬러 자동차도 3년, 대형 중장비회사인 캐터필러는 5년, 복사기의 대명사인 제록스는 10년이 걸려서야 기업회생을 성취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5대재벌은 국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막강한 것 같지만 국제적 기준으로 본다면 취약한 기업집단들이다.

지난 한햇동안 우리경제를 대표했던 30대 재벌중 반 이상이 쓰러졌던 것처럼 5년후 오늘의 5대그룹 전부가 다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세계화된 새로운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대기업만 살아남을 것이므로 정부가 서둘러 지금 당장 인위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성급한 구조조정으로 5대그룹이 해체되면 위축된 민간투자는 더욱 침체될 것이며, 실업자는 더욱 늘게 되고 5대그룹 계열사와 그 하청업계.유관업체 직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게 되고 그러면 국민들의 소비가 되살아날 리가 없다.

우리의 수출이 5월부터 계속 내리막길에 들어서 있는 지금, 우리나라 국내총생산 (GDP) 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민간부문 투자와 소비가 위축되면 내년 2분기로 정부가 예상하고 있는 경기회복은 성취될 수 없고, 오히려 대량 실업자군과 취업의 희망을 잃은 학생들이 합세한 격렬한 춘투 (春鬪) 의 계절이 올지도 모른다.

정부는 싫으나 좋으나 5대기업을 우리나라 경제회생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재벌개혁을 투명한 새로운 경영환경 속에서 시장경제의 원칙에 맡겨야 한다.

박윤식(미 조지워싱턴대교수.국제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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