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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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2월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 시대의 참담함 속에서 맞이한 무인년 (戊寅年) 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힘든 한 해였다.

수많은 이들이 일터를 떠나야만 했고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길거리로 나앉기도 했다.

부채 더미 속에서 버티기가 못내 힘겨웠던 이들은 더러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 은 한국은 IMF로 중산층의 자살이 늘어 전체 자살자가 전년보다 35%나 늘어났다고 전한다.

일터에 남은 이들이라고 해서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들대로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산더미처럼 불어난 일감을 끌어안고 불안한 마음으로 쉼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만 했다.

한 의사는 "당장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인데도 '매일 통원치료를 할테니 제발 입원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 고 통사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 걱정스레 말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이라도 결격사유 (?)가 있으면 구조조정에서 1순위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건강마저 뒷전으로 내몬 셈이다.

IMF 충격파는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아내들의 가출이 줄을 이으며 사회복지기관에는 졸지에 생고아가 돼버린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언젠가 돈을 벌게 되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도 낯선 복지시설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사업하는 이들은 물론 봉급생활자 가운데서도 별 뜻 없이 빚보증을 서주었다가 상대방이 빚을 갚지 못하게 돼 날벼락을 맞은 가정들도 부지기수였다.

인질처럼 엮어진 채무보증으로 친척 가운데 한 사람만 부도가 나면 일가가 쑥밭이 되기 일쑤다.

IMF의 융단폭격은 젊은이들에게도 퍼부어졌다.

60년대 이후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엄청난 실업 앞에 젊은이들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것부터 거부당하고 있다.

대학 4년생 중 아예 자신을 '예비 실업자' 로 치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IMF는 젊은이들의 꿈마저 앗아갔다.

IMF라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한햇동안 우리가 만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무인년의 끝자락에 서서 나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다.

물질적인 풍요가 사라진 자리에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돼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한 직장인은 "이제 아무도 적당히 근무시간을 때우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취직 시험에만 합격하면 모든 준비는 끝' 으로 여기던 사회인들은 구조조정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직장은 영원한 선의의 싸움터' 임을 절감하고 있다.

나이 파괴.경력 파괴의 현실 속에서 직장문화는 강도 높게 끊임없이 실력을 쌓을 것을 주문한다.

주먹구구식 운영도 사라져가고 있다.

한 기업가는 "영업사원이 매월 결산일을 하루 이틀 앞두고 대리점 등에 적당히 압력을 가해 판매량을 부풀리는 편법으로 영업이익을 남긴 것처럼 눈속임하는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고 했다.

매출액.대리점수 등 영업 항목을 세분해 매뉴얼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 시스템이 달라진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허세도 사라져가고 있다.

최근 토탈유통㈜을 설립한 홍성철 대표이사는 "대기업에서 과장급을 지내다가 그만둔 사무직 가운데 트럭에 물건을 싣고 가 거리에서 판매하는 일을 맡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다" 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대형 빌라나 아파트에 살던 이들 가운데 일부는 불필요하게 큰 집을 줄여 이사가기도 한다.

실리추구로 바뀐 것이다.

얼마전 나는 퇴근길에 버스에 오르내리는 승객들을 향해 일일이 "감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하며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운전기사를 만났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승객들이 내릴 때에는 "수고하셨습니다" 하며 함께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분명 우리 사회는 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긍정적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리가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나갈 수만 있다면 IMF의 대차대조표는 흑자로 기록될 수 있다.

충격 속에서 정신없이 달려온 무인년, 잠시 숨을 멈추고 우리 가정에서 화 (禍)가 복 (福) 된 것은 무엇인지 헤아려 보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홍은희(생활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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