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일·미 FTA, 일본 민주당의 말 바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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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일본의 민주당과 사민당·국민신당 등 야 3당이 30일의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동정책을 발표했다. 민주당 주도의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큰 만큼 협조 가능한 군소 야당과 미리 손을 잡고 안정적 집권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다 보니 정권교체라는 대업에 차질을 줄 것 같은 것은 아예 건드리지 않고, 인기를 끌 만한 정책 나열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기 충분한 모양새가 돼 버린 느낌이다.

재정 건전화를 위한 소비세율 인상 논의를 접어 둔다거나, 외교·안보상의 민감한 부분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은 대신 보육과 교육, 사회보장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지원 방안이 두루 제시돼 있다. 당연히(?) 재원 마련이나 도입 시기 등은 대충 애매하게 넘겨 버렸지만 말이다.

공동정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민주당 정권 공약에는 ‘일·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교섭을 촉진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전후 사정을 모르고 이 문구만 본다면 민주당이 미국과의 FTA 체결에 열정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과연 그럴까. 지난 7일 일본 도쿄에서는 전국농업협동조합중앙회 등 농업단체들이 모인 가운데 ‘미국과 FTA를 체결한다’는 민주당의 공약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일본 농업을 파괴로 이끌 FTA 체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결의가 이뤄진 건 당연했다. 그러자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 대표대행은 기다렸다는 듯 같은 날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과의 FTA를 ‘체결한다’에서 ‘교섭을 촉진한다’로 바꾼다고 발표했고, 내친김에 ‘국내 농업과 농촌의 진흥 등에 해가 되는 정책은 추진하지 않는다’는 선물까지 얹어줘 버렸다. 속된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공약 수정에 대한 간 대표대행의 설명이 가관이다.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표현을 바꾼 것’일 뿐 기본 방침은 바뀐 게 아니라나. 일본식 어법을 감안하면 수정된 문구는 오해의 소지를 줄이긴커녕 거의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얘기다. 그래서 보다 분명하게 ‘해(害)가 될 정책은 추진하지 않는다’는 문구까지 덧붙여 준 것 아닌가 말이다. 결국 소신은 소신이고, 표는 표라는 얘기다. 표가 모든 것을 말하는 선거에서, 게다가 정권 쟁취 최대의 호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소신은 그저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바’일 뿐이다.

그런 일을 한두 번 보고 겪은 게 아닌 이 나라에 살고 있긴 하지만, 선진국이라는 일본도, 진보적 지성을 내세우는 민주당도 결국 다를 게 없는 정치단체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과연 그런 체면 불고-정치적 수사로야 여론 수렴이겠지만-의 노력들이 합쳐져 이번엔 민주당이 정권 교체의 비원(悲願)을 이룰 수 있을지, 이달 말 바다 건너에서 들려올 선거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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