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회장-김정일 무슨 얘기 나눴을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김일성 (金日成) 주석 사망 이후 우리측 인사로는 처음인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김정일 총비서의 만남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까. 일각에서는 鄭명예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는 등 남북 정상간 간접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어 더욱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45분간의 만남에서 양측은 대부분 석유개발을 비롯한 경제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며 '정치적인' 이야기는 없었다고 현대측은 강조하고 있다.

한 현대 관계자는 "경제에 관한 얘기를 한다는 조건 아래 만난 것" 이라면서 "정치적인 이슈가 있었으면 면담 자체가 어려웠을 것" 이라고 말했다.

鄭명예회장과 김정일 총비서간의 면담이 이뤄진 것은 鄭명예회장 일행이 돌아오기 하루 전날인 지난달 30일 오후 10시25분쯤. 밤 10시가 다되도록 면담일정을 통보받지 못해 초조하게 기다리던 차에 김정일 총비서가 숙소인 백화원초대소 (영빈관에 해당)에 온다는 전갈이 왔다는 것.

당초 김정일의 집무실이 있는 금수산 의사당 등에서 그를 만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가 초대소 (영빈관에 해당) 를 직접 찾아왔다.

10시15분쯤 鄭명예회장 일행은 방에서 나와 약 10분간을 걸어 초대소로 가 김용순 아태위원장.송호경 부위원장을 대동하고 온 김정일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인데 연로하신 鄭명예회장께서 불편하실 것 같아 직접 찾아 뵈었다" 고 예를 갖췄다는 게 정몽헌 현대회장의 전언.

북한측의 요청에 의해 鄭명예회장과 동생인 정희영.매제인 김영주 한국프랜지 회장과 정몽헌 회장 4명만 자리를 함께 했다.

김정일이 가운데 소파에 앉고 鄭명예회장이 오른쪽, 정몽헌 회장은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김영주 회장은 "金총비서는 사진촬영을 의식해서인지 처음 악수를 나눌 때는 다소 얼굴이 굳어 있고 말투도 의식적인 듯 했으나 식구들과 단독면담 할 때는 미소를 머금고 말도 시원시원하게 해 인상적이었다" 고 전했다.

김정일은 공산국가 관료들이 흔히 입는 카키색 인민복에 금테 안경을 썼으며 단정한 차림이었다.

또 서울 표준말에 가깝게 발음했으나 대화가 진행될수록 평양 사투리가 배어 나왔다는 것.

김정일은 鄭명예회장을 '鄭선생' , 또는 '鄭명예회장' 이라고 부르면서 시종 공손한 태도를 보였고, 鄭명예회장은 그를 '장군' 이라고 호칭하면서 화기애애한 가운데 대화가 진행됐다.

김정일은 "5대 창업자중 유일하게 살아계신 鄭명예회장 선생을 만나게 돼서 영광이다.

명예회장 선생이 황소 같은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라고 말했다.

鄭명예회장과 김정일은 45분간 대화를 나눴는데, 거의 대부분 경협 등 경제에 관한 얘기가 오갔으며 김정일은 현대의 대북 (對北) 경협사업에 대해 이미 보고를 받았는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 한 관계자는 "김정일은 말하는 것을 즐기고 유머감각도 풍부한 사람으로 매우 건강해 보였으며 손바닥이 두꺼웠다" 고 전했다.

이날 면담에서는 남북한 공동 석유개발사업도 논의됐다.

이와 관련, 鄭명예회장은 지난달 31일 귀환후 "金장군이 북한에서 석유가 난다고 하기에 내가 남한에서 파이프라인으로 공급받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고 대화내용 일부를 소개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기대보다 늦어졌다" 며 배석한 김용순 (金容淳) 아태위원장에게 질문했으며, 이에 대해 金위원장은 "예정보다 늦었지만 곧 실현될 것 같다" 고 답변했다는 것. 이 자리에서 정몽헌 회장은 "모든 분이 협조해 주어 11월중에 실현될 것" 이라고 말했다고 현대측은 전했다.

면담이 끝난 후 양측은 초대소 입구에 걸려 있는 대형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몽헌 회장은 "기념촬영을 위해 金총비서를 가운데로 모시고 곁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가 한사코 연장자인 아버님이 가운데 서야 한다고 해 아버님이 가운데 서고 金총비서와 내가 옆에 서서 사진을 한장 더 찍었다" 고 일화를 소개했다.

김정일은 또 鄭회장과 헤어지면서 "언제 또 오실 것이냐. 길이 터졌으니 자주 오라" 고 인사했고, 이에 鄭명예회장은 "석유를 주면 언제든지 오겠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고 화답했다고 현대측은 밝혔다.

한편 김정일과의 면담이 방북 (訪北) 마지막 날 밤 이뤄지긴 했으나 면담 자체는 북한 방문 전에 이미 약속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북한체제의 성격상 면담일정 등을 사전에 확정할 수 없었으며 김정일의 일정에 맞추느라 당초 2박3일 일정이 3박4일로 늘어나고 북한에 들어간 후에도 또 다시 하루가 연기됐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들어간 후 김정일과의 면담 통보가 오지 않아 "만나뵙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는 鄭명예회장의 뜻을 북한측에 강력히 전달, 두사람의 만남이 성사됐다고 현대 관계자는 설명했다.

김진원.김준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