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허리는 조이고 띠는 풀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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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끔 주책없이 굴어 우리를 즐겁게 하는 탤런트 전원주가 엊그제 저축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포장을 받았다.

통장 10여개에 2억7천만원을 알뜰살뜰 모은 그는 5천원짜리 점심을 먹으면 가슴이 벌렁거린다는 소문난 절약파다.

그런 그가 요즘 또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경제사범을 조사하는 당국에서 그를 '한국 경제 생산기반 파괴범' 으로 입건한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이다.

근검절약한 공로로 훈장까지 탄 그가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혐의를 받게 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작금의 우리 경제는 지나치게 소비가 위축된 나머지 실물경제의 생산기반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게 됐소이다.

이런 판국에 1천5백원짜리 구내식당 밥으로 점심을 때우다니, 어허!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생산기반 붕괴 예방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겠는고. 뭐 지난달 단 한번의 외식이 아직도 후회스럽다고? 이런 새가슴이 IMF시대의 국민된 자세인고. 소비를 줄이랬더니 어쭈구리 소득이 감소된 것보다 3배를 더 줄여? 도대체 절약이 미덕이라고 누가 말했는고, 뭐 짠순이 아줌마 전원주가 말했다고, 그를 잡아 대령하렷다. "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를 극복하려면 허리를 질끈 동여매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부가 농가 부채를 탕감 또는 상환유예해준다는 소식이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 정책처럼 들린다.

허리를 조이는 이유가 근검절약해서 빚을 갚자는 취지일 텐데 빚 자체가 없어지면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사회간접자본 같은 공공투자를 확대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62조원이나 되는 막대한 규모의 국.공채를 발행하는 것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다.

긴급한 곳에 쓸 돈을 마련하려면 먼저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여야 할 텐데….

지난해말과 올해초의 비장한 분위기를 희석시키는 정책은 아직 많다.

부동산 경기를 자극하고, 소비자 금융을 재개하고, 소비를 자극할 감세조치를 계획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이 모든 정책 전환이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거름' 이라든가 '국난 극복의 지름길은 눈물과 땀밖에 없다' 는 IMF시대의 굳은 맹세와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그건 아닙니다. 단지 내수 (內需) 진작이 안되면 생산기반 자체가 무너질까 걱정할 뿐입니다. "

"그러나 구조조정이니 경제개혁이니 하는 것들이 다 뭡니까. 경쟁력이 없는 산업이나 기업은 무너지고 경쟁력이 있는 것만 살아남자는 것 아닙니까. 공공분야건 가계건 거품을 빼야 생존할 수 있을 텐데요. " "거품을 빼다가 생산기반 전체가 무너지면 더 큰 일입니다.

적절한 소비, 합리적인 소비가 바로 경쟁력 향상의 전제가 됩니다.

정부가 돈을 찍어내고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촉진하는 깊은 뜻을 왜 모르십니까. "

사람들은 그제서야 '아 그렇구나' 하며 무릎을 친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즉각 행동으로 옮긴다.

김씨는 우선 '적절' 이니 '합리' 니 하는 말의 뜻을 알려고 도서관으로 달려간다.

이씨는 절약이라는 지겨운 말보다 소비라는 즐거운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막 쓰기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의 반응은 분명해서 좋지만 박씨는 그렇지 않다.

그는 쓸까 말까 망설이며 이렇게 중얼댄다.

"허리를 조입시다, 외채는 물려줄 유산이 아닙니다.

이렇게 명백한 메시지가 내 행동을 결정하던 시절이 그립구나!" 더 골치아픈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최씨다.

그는 생산기반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공장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로나 반월 또는 구미나 울산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쩨쩨한 소비 때문에 저 우람스런 공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흘끔흘끔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정말 대책없는 사람은 정씨다.

그는 절약과 소비를 다 충족시키려고 허리는 조이고 띠는 풀었다.

그러자 바지가 흘러내렸다.

정씨는 처량하게 묻는다.

"나는 클린턴도 아닌데, 어떡하죠?"

김성호(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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