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큰스님 선문답]2.보성 율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가을 밤비에 불어난 주암댐 물이 흘러넘칠 듯 둑에 넘실거린다.

아스라한 수면 저 멀리로는 전남 송광사를 슬하 (膝下)에 둔 조계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지극히 자연스런 이 사실, 이 이치가 바로 지상에 구체화돼 나타나 있는 삼계무법 (三界無法) 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옛 어른들은 이럴때의 의경 (意境) 을 "시를 짓고 싶은 정감 가을 물처럼 맑고, 그림을 그리려는 마음 먼 산처럼 밝다 (詩情秋水淨 畵意遠山明)" 고 했던가.

청산녹수 앞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는가 보다.

흰 구름 머리 위에 두둥실 떠있고 조계산 푸른 계곡물은 오묘하게 줄 없는 거문고를 타건만 알아 듣는 이 얼마나 될까.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 보성 (菩

成.70) 율사를 만나 줄 없는 거문고 소리를 들어 봤다.

[대담=이은윤 종교전문위원]

문 : 이 절에 계신 스님들은 모두 송광사 앞 '조계의 물 한방울씩 (曹溪一滴水)' 은 마셨습니까.

답 : 내 자네가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다.

문 : 방장스님께서는 조계의 불법 (佛法) 을 얻으셨습니까.

답 : 나는 불법을 모른다 (不識) .

<승보 (僧寶) 사찰 송광사는 절 앞에 조계라는 계곡물이 늘 푸르게 흐른다.< p>

송광사가 자리한 산명 (山名) 이며 계곡 이름이기도 한 '조계' 는 동아시아 선불교 제6대 조사 혜능대사 (638 - 713)가 개창한 선종의 주류인 돈오 남종선 (南宗禪) 의 불법과 종풍 (宗風) 을 상징한다.

원래 조계는 중국 광동성의 조 (曹) 씨 집 성촌인 동네 이름겸 그 마을 앞의

시내 이름으로 혜능 (慧能) 조사가 36년동안 머물며 행화 (行化) 를 펼쳤던 곳이다.

현재 조계종이라는 한국불교의 종단명칭도 혜능의 남종선 법맥을 계승한 선종 (禪宗) 임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질문은 그래 조계총림에는 그 이름에 어울릴만큼 천하를 흥건히 적신 조계 법유 (法乳) 한방울을 마신 깨달은 선승들이 많으냐는 얘기다.

보성방장은 질문의 화살이 나르자 털로 만든 소리 안나는 전박판 (氈拍板) 을 들어 "그 정도라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라" 고 응수했다.

'불식 (不識)' 이라는 말은 의식에 얽매이지 않은채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가장 적합한 말이다.

달리 말한다면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를 모를 때 쓰는 '부정적 긍정' 이다.

우리는 아내가 감정이 토라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몰라 몰라" 라고 앙탈을 부리거나 익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려고 "잘 모르겠는 걸" 하는 말들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한다.

이럴 때의 '불식' 이 바로 겉은 부정이지만 속은 긍정인 부정적 긍정이다.

선종은 달마 이래로 문자 밖의 도리인 불법 진리를 부득이 표현해야 할 경우 이처럼 '불식' 이라는 말을 써오고 있다. >

문 : 스님께서는 무슨 도리 (道理) 를 보았기에 이처럼 공기 맑고 경치 좋은 조계산에서 안주하고 계십니까.

답 : 똥독에 빠져 있다.

<참으로 깨친 사람은 결코 열반이라는 곳에 주저앉아 즐기기만 하고 있어선 안된다. 열반의 경지까지도 박차고 한걸음 더 나가는 백척간두 진일보 (白尺竿頭 進一步) 를 해 완전한 공의 세계 (속세) 로 들어가 중생과 삶을 같이 하면서 세속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돼야 한다.< p>

이것이 바로 선이 지향하는 '부주열반 (不住涅槃) 이라는 지향점이다.

보성방장은 왜 난데 없이 똥독 이야기를 했을까. 그에겐 똥독이라는 오탁악세 (五濁惡世)에 빠져 오물을 뒤집어 쓴 것쯤은 문제가 되질 않는다.

똥물은 기어나와 뜨거운 물로 샤워 한번하면 냄새도 찌꺼기도 깨끗히 씻겨나간다.

그러나 그의 중모습.중냄새는 아무리 비누칠하고 씻어내도 없어질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 절박한 것은 불법의 본질을 상징하는 중모습.중냄새지 몸둥이에 묻은 똥물이 아니다.

보성방장의 '똥독' 에는 속인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겉모습 뒤에는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불법의 향기 (스님 냄새)가 풍기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게 엿보인다.

선법 (禪法) 의 고향인 역설 (逆說) 의 아성속에서 빛나고 있는 그의 악랄한 가풍이다. >

문 : 지금 세속은 10대 윤락녀의 절반이 여중생이고 심지어 마누라까지 바꿔 노는 성도덕의 문란이 심각한데 이들을 제도 (濟度) 할 방편이 있으십니까. 답 : 우리 모두가 고향을 멀리 떠나 불행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同是天涯 淪落人) .

< '동시천애윤락인' 은 중국 당나라 3대 시인중 한사람인 백거이 (白居易.772 - 846) 의 시 "비파행 (琵琶行)" 에 나오는 7언구다. 시의 주인공은 신분 몰락으로 술집에 나와 비파를 뜯으며 작부생활을 하고 있는 기구한 삶의 한 여인이다.

'윤락녀 (淪落女)' 라는 말도 여기서부터 비롯했다.

때때로 많은 지성인들에게서 보아오듯이 행동과 도덕의 질 (質) 을 결정한다는 이성도 섹스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무력하지 않던가.

보성방장이 백거이의 싯구를 인용한 것은 인간의 본래 고향인 청정심을 상실한 세태를 개탄한 것이다.

이 싯구는 술집서 응큼하게 여자를 꾀일 때 써먹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인간 도덕성의 타락을 아파하는 외마디 소리요 본래심 (本來心) 회복의 촉구다. >

문 : 비 오는 날은 나막신 장수딸이 걱정이고 개인 날은 우산 장수딸이 걱정인 노파의 근심을 어찌해야 확 풀어줄수 있겠습니까.

답 : 비 오는 날은 우산 장수딸만 생각하고 개인 날은 나막신 장수딸만 생각한다.

< '노파근심' 이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도 선은 이처럼 농담 같은 한마디로 쉽게 풀어낸다. 보성방장의 답은 초등학생들도 쉽게 맞힐 수 있는 해답이다. 마음속에 천지를 담고 있는 상태가 곧 선의 세계다. 선에서 말하는 마음은 '생명' 을 뜻한다. 그 생명은 추우면 화롯불 쬐고 더우면 부채질 하는 무의식이라는 야성적 에너지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모든 걱정의 뿌리인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비 오는 날은 우산 장수딸, 개인 날은 나막신 장수딸만 생각하도록 훈련 (수행) 해 긍정적 사고속에서 살면 노파의 근심은 사라질 수 있다.

세살 먹은 아이도 알기는 쉬운 일을 80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 하지 않았던가. >

문 : 옛날 조사스님들은 돌과 나무 같은 무정물도 불법을 말하고 알아듣는다는 무정설법 (無情說法) 을 설했는데 요사이 국제 금융시장의 투기꾼들은 부처님 말씀을 전혀 못 알아듣는 것같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답 : 삵괭이와 흰 소 (理奴白고)가 불법을 안다.

<최근 세계 금융시장에서 1일 거래되는 1조5천억달러중 그 1백분의 1인 1백50억달러만이 산업자본으로 투입되고 나머지는 모두 투기자본이라고 한다.< p>

질문은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한 자본주의 세계 한편에서 맹목적인 충동에 들떠 투기적인 카지노 자본주의 파도를 타고 윈드서핑하는 국제 투기금융 현실을 비판, 그 해답을 찾고 있다.

맹수류에 속하는 삵괭이는 주린 배를 채우는 사냥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는다.

배불리 먹고 나면 그저 낮잠을 자고 우주가 선물한 대자연의 정경을 두눈 뜨고 즐긴다.

소는 인간을 위해 매를 맞으면서도 불평 없이 논.밭갈이하고 묵묵히 무거운 짐을 실은 우마차를 끈다.

선에서는 대지와 수평적인 동물들의 자세를 직립 (直立) 의 인간보다 훨씬 더 불법 진리에 부합하는 안정 (Well - being) 의 상태로 본다.

사람은 직립하면서 피를 위로 끌어 올리는 장력 (場力) 을 지탱하느라 고통을 겪고 있다.

정글법칙을 따라 사는 삵괭이와 일만 하는 농우 (農牛)가 오히려 무욕.보살도라는 불교 교리에서 볼때 무한대의 욕심에 불타는 투기 자본가들 보다 한참 위라 할수 있다.

'이노백고' 라는 화두는 선학적으론 욕망의 절제.보살도 외에도 일부러 동물처럼 어리석은 척 하는 가운데서 선리 (禪理) 를 터득하는 '치둔 (痴鈍) 의 철학' 을 상징한다. >

문 : 3계 (욕계.색계.무색계) 를 통털어 이 세상 어디에도 가시적인 형체를 가진 법 (法.진리) 은 없다 (三界無法) 했는데 어디서 마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답 : 주암댐 물이 둑에 넘친다.

<우주와 내가 하나로 합쳐졌을때 둑에 넘치는 가을물처럼 마음이 홀연히 드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이 세계에는 오직 마음만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는 얘기다. 옛날 반산보적 (盤山寶積) 선사는 푸줏간 앞을 지나다 주인과 손님의 대화를 듣고 깨쳤다.손님이 "제일 좋은 고기를 주게" 하니까 주인은 칼을 내동댕이 치면서 "우리집 고기는 모두 제일 정육일뿐 나쁜 하나도 없다" 고 호통을 쳤다.< p>

반산에게는 푸줏간 주인의 말이 "이 세상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로 들렸던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상징하는 저수지에 넘실거리는 가을물은 분석하고 생각하는 의식작용 저 아래에 깊숙히 자리한 우주 근원과 연결된 존재의 밑바탕이다.

마음이란 이같은 무의식 세계로 깊숙히 들어가지 않고는 찾아낼수 없다. 반산의 '삼계무법' 이라는 화두는 이처럼 생명의 근원인 무의식을 일깨운다. >

[보성율사는…]

▶1928년 : 경북 성주 출생

▶45년 : 해인사서 사미계 수지

▶50년 : 해인사 강원 중등과 수료 해인사서 비구.보살계 수지 ^62년 : 총무원 종무위원

▶70년 : 송광사 총무국장

▶71년 : 광주 증심사 주지

▶73년 : 송광사 주지

▶74년 : 조계종 종회의원

▶81년 : 단일 계단 (戒壇) 유나

▶91년 : 송광사 주지

▶54년이후 30 하안거 (夏安居) 수행

▶98년 4월~: 송광사 방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