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포탄껍질서 다리소재로까지 종이의 놀라운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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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파피루스에서 포탄껍질까지 - .단순한 필기용지에서 군사용 부품에 이르기 까지 종이의 쓰임새가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첨단기술의 힘을 업고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는 종이의 새로운 모습들을 알아본다.

군수업체인 H사는 최근 다양한 구경의 전차포탄 껍질 (탄피) 을 종이로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종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라는 성분을 플라스틱 성분의 첨단 섬유와 결합시켜 아주 단단하면서도 기능이 뛰어난 포탄 껍질을 만들어 낸 것. 황동이 주 성분인 기존의 포탄 껍질이 '한낱' 종이에 자리를 양보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국산기술로 종이 포탄껍질을 만드는데 참여한 이 회사의 K연구원은 "새 포탄껍질이 기존 황동제품에 비해 여러모로 우수한 점이 많다" 고 설명했다.

쇠처럼 단단한 것은 물론 생산원가가 크게 싸고 껍질자체에도 화약성분이 있어 종전보다 10%가량 폭발력을 더 높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또 껍질채 타고 종이 특유의 통기 (通氣) 성 때문에 폭발 후 발생하는 유해가스도 배출이 잘 돼 병사의 건강에도 해가 없다.

종이섬유 (셀룰로오스)가 이처럼 강도높은 포탄껍질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특유의 분자배열 구조 때문. 미국 제지회사인 세인트 레지스사 (社) 는 종이로 다리를 만들어 그 위로 자동차가 지나는 광고를 내보낸 일도 있을 정도다.

이 광고에서 사용된 종이는 흔히 골판지라 불리는 것. 종이와 종이 사이를 또 다른 종이를 이용해 사다리꼴 모양으로 잇는 구조로 된 골판지는 수십 장을 쌓아 배열하면 수t 무게도 거뜬히 견디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이의 저력은 전자제품의 핵심부품인 인쇄회로기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전기밥통.TV 등에 꼭 필요한 이 부품은 상당 부분이 종이를 주원료로 만들어진다.

한국화학연구소 펄프제지연구센터의 오세균 (吳世均) 박사는 "종이는 절연성이 가장 뛰어난 소재 중의 하나" 라며 "적당한 첨가물만 넣어준다면 수만 가지 모습으로 변신 할 수 있다" 고 말했다.

고유의 인쇄용지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첨단기술이 종이에 녹아들고 있다.

70년대 개발된 팩스 용지가 고전적인 예. 아직도 일부 팩스에 사용되고 있는 두루마리 형태의 이 용지는 종이 위에 아주 작은 물감 알갱이를 촘촘히 박아놓은 특수 종이다.

뜨거운 열을 감지하면 이 물감을 싸고 있는 막이 툭 터지면서 글자가 쓰인다.

최근 레이저 프린터 기술이 나오면서 자리를 잃어가고 있지만 수퍼마켓의 가격표에서는 오히려 위력을 더하고 있다.

가격표를 자주 그리고 빨리 바꿔주는 데는 이 용지만한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비행기표의 필기 복사본으로 사용되는 종이도 비슷한 원리. 열 (熱) 대신 글씨를 쓰는 압력에 의해 종이 위의 미세한 물감덩어리들이 터져 글씨가 복사된다.

강원대 제지공학과 조병묵 (趙炳默) 교수는 "다소 과장한다면 종이는 개발 여하에 따라 못쓸 데가 없을 정도" 라고 말한다.

예컨대 커피의 거름종이는 종이 특유의 통기성을 한껏 이용한 것. 눈에 안 보이는 수천 분의 1㎜ 단위의 구멍이 뽕뽕 뚫린 이 거름종이는 훌륭한 무공해 체인 셈. 흡수성 또한 웬만한 소재들이 못 따라오는 종이의 장점. 종이 물수건이나 종이 기저귀 등이 이런 성질을 이용한 대표적 상품이다.

없어서는 하루도 불편한 화장지 역시 같은 경우다. 종이의 흡습성과 부드러운 감촉을 흉내낸 인공소재까지 등장하고 있다. 석유화학의 산물인 폴리비닐을 주성분으로 한 부직포는 그 한 예. 천연섬유 같은 편안함과 보온성을 가져 옷의 안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셀룰로오스의 인공적인 제조는 여러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인공적인 셀룰로오스 합성법도 경제성 등을 따져볼 때 나무가 만들어내는 것보다 훨씬 뒤처지기 때문. 본질 (셀룰로오스) 의 복사 만은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첨가물과 제조공법에 따라 천의 얼굴을 보이는 종이가 21세기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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