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시시각각

갈 곳 잃은 진보적 중산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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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런데 지난 대선 이후 이들의 진보적 성향을 담아낼 정치적 그릇이 실종됐다. 계급적 파당을 내세운 민노당은 제쳐놓더라도 전통적으로 중도좌파 성향인 민주당마저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진보 성향의 중산층들이 보수정권 지지로 완전히 돌아선 것도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여론은 지난해 촛불시위 이후 지지를 철회한 채 관망 중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가운데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는 광범위한 정치적 부동층이 마음을 둘 곳을 잃은 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민주당은 지금 대선과 총선 참패 이후 전세를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 다.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린 진보 성향의 중산층만 끌어들일 수 있어도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 대선에서 역전 가능성이 큰데도 말이다. 진보 성향의 중산층이 등돌릴 짓만 골라 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특성은 진보나 보수 성향을 떠나 기본적으로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급격한 변화나 폭력엔 체질적인 거부감을 보인다. 진보 성향의 중산층은 그래서 점진적 개혁과 평화적인 해결책을 선호한다. 특히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 투쟁도 아닌 사안을 두고 과격하게 물리적으로 대응하는 민주당의 행태에 중산층은 질색한다. 민주당은 민주적 절차를 따르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기만 해도 얼마든지 심정적으로 동조할 자세가 돼 있는 진보 성향의 중산층을 극단적인 반대와 장외투쟁으로 한사코 떼민다.

민주당은 이제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진보적 가치마저 내줬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습적으로 내세운 중도실용과 서민 중시 정책에 변변한 대응도 못 한 채 애꿎은 미디어법만 붙들고 땡볕에 나앉고 만 것이다. 여기다 좌파적 정책이라도 필요하면 쓰겠다는 정부 여당으로부터 “좌파라면 좌파다운 가치와 비전을 제시해야 할 텐데 민주당이 뭘 내세우는지 모르겠다”(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는 비아냥까지 듣는 신세가 됐다.

올여름 민주당과 진보·좌파 진영이 꼭 한 번 읽었으면 하는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캐나다의 좌파 철학자 조지프 히스가 쓴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이고, 다른 하나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을 지낸 진 스펄링이 지은 『성장 친화형 진보』다. 히스의 『자본주의를 …』은 진보·좌파 세력에게 자본주의의 본질과 우파 논리의 함정을 좀 제대로 알고 싸우라고 일깨우는 지침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작동 원리를 무시하는 무작정 반대나 무식한 대안 대신 기존의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을 인정하면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스펄링의 『성장 친화형 진보』는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성장을 외면해선 안 된다며 진보적 관점에서 본 성장전략을 제시한다. 이 두 책이 제시하는 정도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민주당이 가질 수 있다면 진보적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은 시간 문제다.

민주당이 당장 즉효를 볼 수 있는 현안이 하나 있다. 미디어법 반대 투쟁을 접고 쌍용차 노조원을 설득해 평화적으로 공장문을 나서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의 지지도 함께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