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8.금강산 백화암 부도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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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삼불암 문바위에서 표훈사로 향할 때 나는 이 천하의 명승에서 뭣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혼자 차지하려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었겠지, 그렇지 않으면 예쁜 여자 하나 놓고 둘이 싸우는 그런 다툼이었겠지 하며 세속적인 해석을 내려보고는 이내 잊어버렸다.

삼불암에서 표훈사까지는 불과 1㎞. 그러나 같은 만천골이라도 아래쪽 장안동과 달리 표훈동은 계곡이 넓고 산세의 기상이 장대한데다 소나무.잣나무가 산길을 줄곧 따라붙어 길동무를 해주니 예부터 금강산 탐승객이 너나없이 찬탄해 마지 않는 계곡이다.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펴낸 '금강산의 력사와 문화' (1984년)에서는 '표훈동은 위치상으로나 전망으로나 내금강의 중심부' 라고까지 했다.

그런 환상의 계곡길을 우리는 비정한 자동차로 5분 만에 통과해버렸다.

찻길은 표훈사 턱밑까지 나 있었다.

주차장은 제법 넓었지만 계곡 바위와 고목이 된 소나무들이 감싸주어 다행히도 절 맛을 다치지는 않았다.

차에서 내리니 곧바로 표훈사 안마당으로 인도하는 중문 (中門) 격인 능파루 (凌波樓) 이층누각이 이쪽을 내려다보면서 어서 올라오라는 듯이 환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그 아리땁고 포근한 정취에 이끌려 나는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쪽으로 발을 옮기려 하는데 안내단장 조광주 참사가 저 아래서 놀림투로 소리친다.

"이쪽으로 내려가서 백화암 (白華庵) 부도부터 볼랍니다.

금강산에 와선 교수선생 자유주의가 심합니다. " 북한에서 쓰는 말 중에서 "자유주의가 심하다" 와 "망탕으로 논다" 는 말은 그들이 제일 싫어하고, 또 제일 부끄러워하는 표현이다.

산길을 오르면서도 줄지어 가는 것이 생활화돼 있는 그들로서는 나처럼 대오에서 떨어져 딴 데를 기웃거리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생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안내단장을 따라 주차장 바로 아래로 나있는 다리를 건너 백화암터로 따라붙었다.

이 다리는 지금은 표훈사교라는 사무적인 이름을 갖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림자를 물에 잠근 다리' 라는 뜻으로 '함영교 (含暎橋)' 라고 했다.

함영교 다리 건너 계곡 저편으로는 고려 때 창건한 백화암이 있었다.

서산대사도 한때 여기에 주석해 당신의 별호가 백화도인 (白華道人)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암자는 1914년에 불타버려 빈터만 남게 됐고 한쪽에 수충영각 (酬忠影閣) 을 지어 금강산에 계셨던 다섯 분의 큰스님 영정을 모셔 놓았었다.

다섯 분이란 지공 (指空).나옹 (懶翁).무학 (無學).서산 (西山).사명 (四溟) 이니 사실상 고려 후기에서 조선 중기에 걸친 4백년 간의 대표적인 스님을 망라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수충영각도 6.25때 폭격맞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제 여기 남아 있는 것은 고승들의 사리탑뿐이니 백화암 부도밭은 금강산의 옛 영광과 자취를 지키는 유일한 유적으로 된 것이다.

부도밭은 아주 깔끔하게 정비돼 단정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조차 흘렀다.

거기에는 혹은 난형 (卵型) 이라고도 하는 둥근 몸체에 팔각지붕을 얹은 부도가 다섯, 혹은 종형 (鐘型) 이라고도 하는 꽃봉오리 모양의 부도가 둘, 돌거북이가 이고 있는 비석이 셋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수충영각의 5대화상 (和尙) 부도가 아니라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되는 제월당 (濟月堂).취진당 (醉眞堂).편양당 (鞭羊堂).허백당 (虛白堂).풍담당 (楓潭堂) 의 부도로 모두 17세기 중엽 유물들이다.

오직 설봉당 (雪峯堂) 하나만이 18세기 초에 세워진 것이다.

이리하여 백화암 부도밭은 남한의 어느 절집에서도 볼 수 없는 조선 중기, 17세기 부도의 늠름하고 장대한 품격을 남김없이 엿보게 한다.

전라도 선암사.대흥사.미황사 등의 부도밭이 장하긴 해도 대개 18, 19세기에다 20세기 부도까지 뒤엉켜 있음을 생각할 때 백화암 부도밭의 정숙미와 조형적 견실성은 한국미술사에서도 귀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백화암 부도밭엔 금강산의 5대화상 중 유독 서산대사 부도만 세워졌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해 볼 그 무엇이 있었다.

서산대사 부도라는 것도 당신의 열반처가 여기여서가 아니라 묘향산에서 다비한 것을 분사리 (分舍利) 해 모신 것이니 수충영각의 큰 스님들은 모두 금강산을 거쳐는 갔을지언정 종신토록 머물지는 않았다는 우연치않은 공통점이 있는 셈이다.

금강산은 정녕 한 사람의 수도자가 득도할 선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찌보면 화려하고 어찌보면 어여쁘고 어찌보면 장엄하고 어찌보면 괴이하니 항심 (恒心) 을 유지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관상쟁이들 하는 말 중에 미인 중에는 상이 자꾸 달리 잡혀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을 만나봐야 비로소 관상의 진묘를 체득할 수 있다고 했다.

금강산이 바로 그런 것인가.

하기야 자신의 감성적 인식능력과 상상력으로도 장악하지 못하는 대상이라면 금강산은 심신도야의 치열한 상대역은 될지언정 득도의 수양처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육당 최남선은 서산대사를 평하면서 대사가 나이 30세까지는 출가 (出家) 한 몸이 재가 (在家) 의 때를 못 벗어 선과 (禪科) 를 본다, 선교양종판사 (禪敎兩宗判事) 벼슬도 지낸다 하다가 "금강산의 전기 (電氣) 를 쏘이고서야 공묘 (空妙) 의 참뜻을 여실히 깨우친 '꿈이야기 (三夢詞)' 같은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고 했다.

주인은 손님에게 꿈이야기를 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꿈이야기를 하누나 지금 꿈이야기 하는 두 사람 그 역시 꿈속의 사람인줄 뉘 알리오 이처럼 서산대사는 세속의 잔재를 홀연히 벗어던지기는 했으나 아직은 '잠꼬대'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신의 아호대로 청허 (淸虛) 한 마음에서 백화 (白華) 같은 자태를 보여준 것은 금강산을 떠난 다음이었으니 그것은 '보현사에서' 같은 시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만국의 도성 (都城) 들은 개미집 같고 고금의 호걸들은 하루살이 같네 청허한 베갯머리에 흐르는 달빛 끝없는 솔바람만 한가롭구나 백화암 부도밭 서산대사 부도비 앞에서 대사의 높은 도덕과 학행을 더듬어가자니 불현듯 금강산은 취해볼 만한 산이로되 무작정 취할 것이 아니라는 비문에 없는 글까지 읽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넋 놓고 다니며 자유주의가 심했던 내 행실에 대한 무언의 일갈이었고, 등줄기 세차게 내리는 선방의 죽비소리 같은 것이었다.

*다음회는 '표훈사' 편입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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