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전시행정이 기업 울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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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추석을 맞아 밀린 임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신용보증기관들이 업체당 2억원까지 특례보증을 실시한다' . 인터넷 프로그램 개발업체인 S사 대표 李모 (39) 씨는 며칠전 이같은 신문기사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어려운 회사사정 탓에 벌써 여섯달째 월급 한푼 못받고도 묵묵히 일해준 종업원 50여명에게 보답할 길이 열렸다는 반가운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절차를 묻기 위해 관계부처에 전화를 건 뒤 李씨의 반가움은 분노로 뒤바뀌고 말았다.

보증기관에 제출할 임금체불 확인서를 받으려면 종업원들의 고소.고발 등을 통해 기업주가 '입건' 된 뒤라야 가능하다는 답변 때문. 게다가 확인서가 나오기까지 한달 이상이 걸린다는 설명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설사 종업원들을 위해 입건되는 것까진 감수한다 쳐도 어차피 추석전에 보증을 받긴 힘들다는 얘기 아닙니까. " 李씨는 실현되지도 못할 대책을 발표해 가뜩이나 힘겨운 기업체들을 우롱한 정부의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비단 체불임금 해소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최근 연이어 요란하게 발표한 기업지원 대책들이 아예 실현 가능성이 없거나 실제 집행 내용과는 달리 잔뜩 부풀려진 것들 투성이다.

정부가 포장만 그럴듯한 '전시 대책' 을 내놓는데 급급할 뿐 '현장확인' 을 소홀히 하는 탓이다.

◇ 말만 그럴듯한 체불임금 해소책 = 정부는 지난 18일 일시적인 자금난으로 임금을 못준 중소기업에 대해 10월말까지 보증한도와 상관없이 신용보증기금.기술신용보증기금을 통해 약식절차만 거치면 2억원을 특례보증 해 주겠다고 밝혔다.

기업측이 지방노동관서에서 임금체불 확인서를 받아 신용보증기관에 제출, 보증을 받아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러나 주무부처인 노동부에선 "일단 종업원들이 고용주를 진정 또는 고소.고발해야만 확인서를 발급해줄 수 있으며 조사기간이 한달 가량 걸린다" 고 말했다.

"실제로는 이미 노동관서에서 조사를 마친 6백74개 사업체 (체불임금 3천2백98억원) 만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전망" 이라는 게 관계자의 귀띔. 게다가 확인서만 받는다고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출판전문업체인 P사의 기획실장 홍모 (40) 씨는 "기술신보에 문의하니 연체사실이 없어야만 보증을 해준다는 답변을 들었다" 면서 "종업원들에게 임금도 못줄 만큼 어려운 기업에서 원리금 연체가 없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고 어이없어 했다.

◇ 부풀려진 중소기업대출 확대책 = 유망 중소기업에 대해 중소기업진흥공단이 9월부터 총 1조5천억원을 직접 대출해 주겠다고 한 8월말 정부발표 역시 집행내용은 발표 당시와는 거리가 멀다.

예산부족으로 대출규모가 5천3백억원으로 크게 줄어든데다 지난 16일에서야 기업들로부터 신청을 받기 시작해 빨라도 10월 이후에야 대출이 시작될 전망이기 때문.

더욱이 정부는 시중은행들이 사업성이 뛰어난 중소기업에 대해서도 담보부족.신용보증서 미비를 이유로 대출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에 중진공 직접대출은 50% 이상을 신용대출해 주겠다던 약속도 저버리고 20%만을 신용대출해 주기로 했다.

한 컴퓨터부품업체의 임원은 "담보나 신용보증서를 요구한다면 일반 금융기관의 대출심사와 굳이 다를 게 뭐냐" 고 불만을 토로했다.

◇ 수출입금융 활성화도 지지부진 = 수출촉진 차원에서 정부가 내놓은 갖가지 수출입금융 대책도 창구에선 제대로 집행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난 8월 중순 정부는 산업은행에 1조원 규모의 무역어음 할인재원을 조성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으나 막상 일부 업체들이 무역어음 할인을 요구하자 산은측에선 "기존에 거래관계가 없어 곤란하다" 며 발을 빼다가 업계에서 정부에 민원을 넣은 뒤에야 시정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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