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신 실향민을 위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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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에겐 팔순을 바라보는 숙부가 한 분 계신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인 숙부는 이따금 명절이면 아무도 몰래 강화도를 찾는다.

강화도에선 재수가 좋으면 먼발치로나마 고향인 개풍을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숙부는 망향의 동산에서 합동제례를 드리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생사도 모른 채 반세기를 지나온 현실을 단숨에 뛰어넘어 마치 부모님을 만나기라도 한 양 무척 흐뭇해 하셨다.

날이 흐려서 그리던 개풍은 감으로도 종잡을 수 없었는데도 북녘 어드멘가를 향해 자식의 예를 갖춘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찾으셨던 것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 을 지닌 사람이 올핸 더욱 늘어날 것 같다.

휴전선이 가로막혀서도 아니고 이념과 체제가 달라서도 아니다.

실직했다는 사실을 늙으신 부모께 알리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애써 고향집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1백50만명을 헤아린다는 실직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나마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대다수의 봉급생활자들도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단체협약에 정해 놓은 정기상여금도 제대로 받기 어려운 형편이다.

보도에 따르면 구로공단에 있는 50인 이상 1백15개 사업장중 47.8%인 55군데가 정기상여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맘때면 늘 한손에 들려주던 회사의 선물꾸러미도 아예 없어진 곳이 적지 않다.

무료로 제공되던 귀향버스도 근로자 부담으로 바뀌거나 아예 귀향버스를 회사차원에서 마련해보려는 계획조차 없애버린 곳이 상당수다.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시대에 맞는 첫 추석엔 고향엘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 (新) 실향민들이 이래저래 늘어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데 신 (新) 실향민들이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이유뿐일까. 그보다 오히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뿌리 깊게 길들여져 있는 '체면 문화' 가 아닐까. 실직의 아픔을 심하게 앓는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대개 3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처음 단계가 전화 받기를 피하는 것. 실직한 줄 아는 이가 전화를 걸어왔든, 모르는 이가 걸어왔든 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화를 받으면서 감정을 제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단계가 지나면 집밖으로도 나오기를 꺼린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자기도 모르는 새 비교해보게 되고 자신만이 사회에서 낙오했다는 열등감에 빠지게 돼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집안에서 혼자 술을 벗삼는다고 한다.

외로움을 달랠 길이 없어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이다가 마침내 건강까지 위협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다 '체면 문화' 탓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에 매달려 있는 한 나락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체면을 떨쳐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도 않다.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

나는 올 한가위 명절이야말로 우리들이 허상에 매달려 있던 이제까지의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생활의 풍상을 적잖이 겪어온 왕년의 톱스타 엄앵란씨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 좌절해 있을 때 그간 제대로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던 친척들과 어머니를 찾아뵈면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고 말했다.

체면의 너울을 스스로 벗어버리기엔 다른 누구보다도 집안 어른들이 가장 편안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좌절을 극복하는 첫걸음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며 자신의 실직 사실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그 단초가 된다.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스스로 실향민으로 전락해 방황하기보다 이번 한가위를 집안 어른들께 '실직 고백' 을 하는 기회로 삼도록 하자. 일가족이 다 찾아가기엔 부담스럽다면 혼자서라도 고향집을 찾아가 어머니를 만나보자.

그래도 차마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편지를 쓰자. 어머니의 품은 언제나 우리가 안기기엔 넉넉하지 않은가.

유난히 썰렁하다는 올 추석. 고질적인 우리들의 허례허식을 떨쳐버리고 진솔한 마음을 서로 나눈다면 어느 해보다도 풍성한 한가위가 되지 않을까.

홍은희(생활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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