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교향곡에는 게르만 민족 특유의 뚝심이 들어 있어요. 집요하게 반복되는 리듬이 멜랑콜릭한 선율로 가득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과는 다르잖아요. 연주자가 권태를 느끼면 청중에게 어떻게 감동을 주나요. 그러다가는 베토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어요. "
지난 15일 서울 북아현동 추계예대 관현악 연습실. 임원식 (林元植.79) 교수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제7번 연습이 한창이었다.
팀파니의 연타와 함께 작열하는 포르티시모에서는 林씨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현역 최고령 지휘자' 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林씨는 '한국 교향악사의 산 증인' .그가 KBS교향악단 명예지휘자로 추대돼 오는 10월 28일 KBS홀에서 열리는 추대기념 연주회에서 KBS교향악단을 지휘한다.
林씨는 지난 48년 해방 후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한 데 이어 56년 KBS교향악단을 창단, 16년간 초대 상임지휘자를 지냈다.
71년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난 후에도 거의 매년 한차례씩 KBS교향악단을 객원지휘해왔지만 명예지휘자 취임 후 첫 공연이라는 점에서 이번 무대는 뜻깊은 공연이다.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지난 95년 지휘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 때 연주했던 곡이다.
이번에는 4악장 피날레만 연주한다.
소프라노 김영애, 알토 장현주, 테너 박세원, 베이스 김명지씨가 독창자로 출연한다.
"데뷔 50주년때 6개월간 베토벤 교향곡 전곡연주를 한 적이 있어요. 베토벤 교향곡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부조리.불행.모순까지 보여주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해내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지요. 음악인에게는 '신약성서' 와 같은 존재 아닙니까. "
지난 56년 당시 14살의 나이로 林씨가 이끄는 KBS교향악단과 협연했던 피아니스트 이경숙 (연세대) 교수가 협연자로 나서 합창.관현악.피아노를 위한 베토벤의 '합창환상곡' 을 연주한다.
또 林씨의 아호를 따서 만든 운파 (雲波) 음악상 수상자인 신예 첼리스트 최정은씨가 생상의 '첼로협주곡' 을 협연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을 건강 비결로 꼽는 그는 소문난 스포츠광. 프로농구.축구.야구관람은 물론 박찬호 선수의 야구 중계방송도 빼놓지 않는다.
"양적으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지만 세계 수준으로 성장하려면 탄탄한 재정 지원이 필요해요. 그러자면 사회지도층들이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져야죠. 현재 민간 교향악단들은 악전고투 (惡戰苦鬪) 중입니다. "
53년 서울예고 창립에 산파역할을 했던 그는 이남수.원경수.박은성.금난새.장윤성 등 국내 지휘계 거목들을 키워냈다.
그런 그가 후배 지휘자들에게 들려주는 충고 한마디. "지휘자는 야전사령관이나 독재자가 아니라 단원들이 가장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가이드입니다.
축구시합에서 심판과 같은 역할이지요. 엄격하면서도 '경기' 의 흐름을 끊지 않는 유연성도 필요합니다.
자신의 음악관은 확고해야 하지만 단원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십분 감안해야 합니다.
지휘자를 평가하는 사람은 우선 단원들입니다.
멋진 동작으로 세속적인 인기에 연연한다면 위험한 일이지요. "
이장직 음악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