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분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경찰이 되는 법이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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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04면

비 내리는 심야의 스톡홀름. 시내버스 한 대가 변두리 도로의 울타리를 들이받고 멈춰 선다. 가야 할 종점을 남겨 두고. 버스 안은 한마디로 도살장. 운전기사와 8명의 승객 모두 난사된 경기관총에 맞아 쓰러져 있다. 젊은 형사 한 명도 죽어 있다. 쏘아 보지도 못한 피스톨을 꽉 움켜쥔 채.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펠 바르 & 마이 슈발 『웃는 경관』

1968년 발표된 스웨덴의 경찰소설 『웃는 경관』은 피 비린내 나는 대량 살육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스톡홀름 경시청 살인과 주임 마르틴 베크. 버스에서 사살당한 형사의 상사다.

아무런 단서도 없다. 피가 흥건한 버스 바닥에 남은 범인의 발자국은 허둥대는 순경이 짓밟는 바람에 다 지워졌다. 명탐정의 현란한 추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럼 하는 수 없다. 형사들이 발로 뛰는 수밖에. 유가족과 목격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탐문수사를 한다. 눈보라 속 잠복근무도 예사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이다.

형사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불만과 자조가 툭툭 튀어나온다.
“가장 따분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경찰이 되는 법이라네.”
“경찰이란 직업은 최고의 지성과 뛰어난 정신적·육체적·도덕적 능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 직업에 전혀 매력을 못 느끼지.”

그래도 사건 수사는 그렇게 하는 법이다. 지푸라기 같은 단서를 파고 또 파고, 물고 또 물고 늘어진다. 그러다 잊혀졌던 미제 사건과의 희미한 접점을 찾으면서 진상에 성큼 다가선다.

이 과정에서 스웨덴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난다. 스웨덴이 어떤 곳인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살펴 준다는 복지국가다.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법한 곳에서 왜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을까. 이 작품은 복지사회의 그림자를 사건의 배경으로 든다. 만연하는 퇴폐풍조, 허물어진 공동체 의식, 이민 노동자의 좌절, 독버섯처럼 번지는 마약 밀매….

부부 작가인 펠 바르와 마이 슈발은 한 인터뷰에서 “60~70년대 스웨덴 사회의 변천을 묘사하기 위해 경찰소설의 형식을 빌렸다”고 말했다. 그들이 부각시키려 했던 것은 퇴조하는 복지사회의 이상, 그리고 그 공백에 밀려드는 배금주의의 폐해다. 작품 속의 범죄는 그런 변화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좌절과 실망, 또는 그런 변화를 이용하려는 욕망에서 저질러진다.

이 책은 65년부터 나온 베크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는 매년 한 권씩 모두 10권이 나왔는데, 이 책이 최고 걸작이다. 베크는 결코 화려한 캐릭터가 아니다. 축구선수로 치자면 든든한 최종 수비수다. 그러면서도 한 방이 있다. 평소 침울하고 무뚝뚝하지만,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그의 인간미는 데뷔작인 『로제안나』에 나오는 이 한마디에 녹아 있다.

“살인범도 사람의 자식 아니겠나. 보통 사람보다 신경이 약간 이상해진, 가엾은 인간일 뿐일세.”
하지만 사건에 치이고, 조직에 휘둘리고, 아내와 틈이 벌어지는 바람에 그는 웃음을 잃는다. 딸 잉그리드는 “지난해 봄 이후로 아빠의 웃는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베크에게 ‘웃는 경관’이라는 팝송 앨범을 선물한다. 책 제목은 여기서 나왔다.

베크 시리즈는 부부 작가의 공동 집필로도 유명하다. 부부가 한 장(章) 한 장 번갈아 썼다. 철저하게 상의하며 썼기 때문에 구성에 틈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75년 남편인 펠 바르가 사망하자 시리즈도 중단됐다. 부부의 마지막 작품은 『테러리스트』.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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