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한복판서 지렁이 키우는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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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낮 12시30분 서울 명동의 계성여고. 학생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여고생 10여명이 친구들 틈을 비집고 목장갑과 호미, 갈고리를 챙겨 나왔다. 이들이 향한 곳은 본관 앞 화단. 화단 한쪽에 잘 영근 방울토마토와 찰토마토, 통통한 오이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도라지와 가지에는 보라색 꽃이 피었다. 3.3㎡(1평) 남짓한 텃밭이었지만 땅은 비옥했다.

계성여고 환경동아리(지렁이반) 학생들


“야야, 살살해. 지렁이 다치겠다.”

한 학생이 호미로 밭을 갈자 옆에 있던 친구가 소리 쳤다. 새까만 흙 속에서 지렁이들이 꼬물거렸다. 학생들은 학교 식당에서 가져온 상추 찌꺼기와 당근 껍질을 구덩이에 쏟아 부었다.

“지렁이 밥이에요. 음식물이 흙 밖으로 나오면 안돼요. 그러면 파리가 끼거든요.”

2학년 소은영 양은 ‘지렁이 밥 주는 방법’을 기자에게 설명하면서 정성스럽게 흙을 다시 덮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더운 날씨였지만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물의 키와 열매 수를 측정해 일지에 기록하는 일은 1학년 정두리 양의 몫이다.

학생들이 키운 유기농 방울토마토.


교장 신점철 수녀가 양산을 쓰고 아이들이 잘 하는 지 둘러 보러 나왔다. 지지대에 묶어둔 방울토마토의 줄기가 웃자라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본 신 교장이 소매를 걷어 붙였다.

“이 마디는 잘라 줘야겠다. 이것도 잡아서 매줘야 하겠는데. 끈은 좀 더 느슨하게 묶어야겠다.”

교장 선생님이 직접 가위를 들고 가지치기를 한 뒤 쓰러진 작물을 지지대에 묶는 방법을 가르쳤다.

계성여고 환경동아리 ‘지렁이반’ 회원인 이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점심시간만 되면 농부로 변신한다. 회원은 1학년과 2학년 6명씩 모두 12명이다.

지렁이 텃밭 일지

지렁이반은 이 학교에서 학교 급식이 시행된 지난 2005년 탄생했다. 급식 이후 음식물 쓰레기를 줄일 방안을 고심하던 신점철 수녀가 학교에서 지렁이를 사육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매년 4월에 학교 화분과 밭에 채소 씨앗을 심을 때 흙 속에 지렁이도 함께 넣어 준다. 지렁이는 학생들이 직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난지 물 재생센터에 가서 쌀자루에 담아 가져온다. 학교 식당에서는 채소나 과일 껍질을 지렁이반 활동이 있는 날 점심시간에 미리 그릇에 담아 놓는다.

학교에서 ‘지렁이 엄마’로 불리는 지렁이반 회원들은 생활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최지현 양(2학년)은 진로를 바꿨다. “교사가 꿈이었지만 환경 쪽에 관심이 생겨서 환경을 연구해보고 싶어요.”

주하나 양(2학년)은 성적이 올랐다고 했다. 주양은 “스트레스 받을 때 밭에서 삽질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점심 먹고 나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졸리는 데 몸을 움직이니까 안 졸리고 그러니까 성적이 오른 거 같다. 반에서 10등 하다 지금은 5등”이라고 말했다.

지렁이반 지도교사인 채지연 수녀는 “지렁이를 징그럽게 생각하던 학생들도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해주고 땅을 기름지게 해준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징그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지렁이를 키우면서 환경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교육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김용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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