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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대법원장이 왜 필요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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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헌법은 대법관의 선정에 국민의 관여를 허용하지 않고, 대법원장의 제청, 대통령의 지명, 국회의 동의라는 정치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의제에 기반한 권력분립 체제에서 국민은 원칙적으로 정치 문제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고 선거의 방법으로 헌법기관의 구성.통제.감시를 할 뿐이다.

*** 사법부 감시는 국회가 맡아야

사법권의 독립에 관한 고려도 있을 것이다. 다수의 의사가 국민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재판이 그것에 좌우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치과정에서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는 다수에게는 사법적 보호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 재판이 시민 다수의 의사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정치과정이 되고 소수는 억압될 수밖에 없다.

판사 집단이 사법부 독립의 명분하에 자기 영속화를 추구해 사실상 계급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국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국회가 담당하도록 기대된다. 주인이 일을 다 하는 집에 하인을 둘 필요가 없듯이 국정사안마다 시민 참여로 결정된다면 헌법과 공무원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결정은 비용이 들 것이며, 여론은 분열될 것이다.

따라서 대법원장이 위원회를 구성해 그 추천을 받은 사람 중에서 대법관을 고르는 것은 낭비적이거나, 헌법 파괴적이거나, 둘 다다.

먼저 대법원장이 시민단체의 의견을 단순히 듣기만 하고 결정에 참고하지 않는다고 하면 세금의 낭비다. 우리는 직분을 다하라고 세금으로 직무 장소를 제공하고 보수를 지급한다. 사법부 조직권을 부여받은 대법원장의 직분 중에 누가 다음 대법관으로 적당한지를 늘 생각하는 것 이상 중요한 것이 있을까?

한편 의사결정이 시민단체의 추천에 영향을 받았다면 헌법의 무시다. 우리는 시민단체의 이름을 쓰는 활동가들에게 어떤 권한을 부여한 바 없다. 실체가 의심스러운 명칭을 가진 조직에 다수 국민은 관여한 바 없고, 그 조직원이 보조금 형태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은 기능적으로 공무원이고 통치자의 의사를 대변한다. 그들의 추천으로 대법관이 정해진다면 제청도 받기 전에 통치자가 미리 결정하게 되니 대법원장은 원격조종되는 거수기로 전락한다.

국회가 시민의 의사를 대표하지 못하기에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면, 시민단체에 관해서도 대표자가 구성원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못할 바 없다. 모든 사람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고 자원의 낭비가 된다. 무정부주의이고 헌법의 부정이고 혁명이다. 현행 헌법을 공부해 법관이 된 것이나 이것을 지키는 것이 부끄러울 이유가 없으니 헌법을 부정할 명분도 없다. 우리의 지도자도 사상이 헌법정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대법관으로 제청된 분은 능력과 인품에 비추어 충분히 자격을 갖추었겠지만, 이런 분들은 많이 있다. 여성이기에 대법관으로 골랐다면 이는 성차별주의적 모욕일 것이기에 합당한 근거가 못 된다. 상대적으로 훨씬 젊은 분을 대법관으로 고른 배경에 기관장에게 세배 안 가고, 수십년 선후배가 맞담배질을 하듯이 평등을 추구하지만, 선배를 제치고 밥값을 내는 것이 실례가 되고 후배가 승진하면 선배는 길을 터 주는 집단문화를 빌미로 선배 법관들의 사직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진 것이라면 훌륭한 판사를 잃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민을 들먹이며 사법부의 판갈이를 꾀하는 세력에 굴복하여 조용히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 젊은 대법관 기용, 판갈이 의도

이제 대법관의 야망을 가진 유능한 판사가 재판에 전념하는 것보다는 일찍 개업하여 하나회 같은 결사를 만들고 시민활동에 적극 참여해 언론 노출에 힘쓰는 것을 현실적 대안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국민이 스스로 통치할 수 없기에 헌법이 있는 것이다. 통치자와 피치자가 같으니 국민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헌법 학설이 '국민'을 지도자로 대체하는 선전과 결합하여 전체주의로 변한 1930년대 독일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 홍(紅)으로 전(專)을 대체하려고 시도한 문화혁명도 공적 절차를 무시한 시민참여가 비극이 된 사례다. 이런 식으로 갈 바에는 대법관을 국민이 참여하는 선거로 뽑는 것이 낫다.

김관기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