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신 주작대로'의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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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서울'이 된 것은 600년 전 일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결단 덕이다. 옥좌에 오른 지 한달 만에 서슬 퍼런 천도령을 내렸다. 뭇 반대가 따랐고 어쩌면 진작에 계룡산 근처가 될 뻔도 했다. 개경(개성)으로 원위치했다 다시 돌아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런 산고 끝에 태어났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명당이다. 주산 아래 남쪽을 바라보는 궁궐을 들인 뒤 사방으로 문을 낸 성곽을 둘러치고 남문을 향해 주 도로를 냈다. 고대 동아시아 도시 건설의 정통 문법을 따른, 이름하여 주작대로다. 양쪽으로 관아들이 늘어섰던 그 육조거리가 오늘날 세종로다.

나라의 얼굴이라고 번듯하고 안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사대문 안에 주거시설 부족이 심해 다툼이 잦았다고 옛 문헌은 전한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후손들에게 "뜻을 펼치려면 모름지기 서울로 가야 한다"고 일렀다. 오늘날 주택난이며 교육 문제가 전혀 새롭지 않다.

성장통을 앓던 서울은 반세기 전부터 남으로 발을 뻗었다. 배산임수의 지형, 남북으로 긴 국토,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필연적이었다. "근대 이전의 상업축이 종로를 따라 동서로 뻗은 것과 대조적으로 근대 이후 서울의 성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이뤄졌다"고 서울시립대 도시계획과 강홍빈 교수는 말한다.

주 도로가 남으로 연장됐음은 물론이다. 신(新)주작대로는 남대문을 지나 용산을 거쳐 한강을 건넌 뒤 최초의 강남개발 지역인 반포에 다다른다. '옮기자' '말자' 말도 많은 요즈음 서울의 성장사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고이 품은 그 길을 따라가 봤다. 요소요소 '터줏대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느꼈다. 그리고 확인했다. 앞으로 어찌 됐든 서울은 정도(定都) 600년, 근대화 100년, 한강의 기적 30년의 무대이자 결과로 남을 것임을. 사진은 어안렌즈로 잡은 남대문 일대의 야경.

글=이훈범 기자 <cielbleu@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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